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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 Jun 21. 2017

<꿈의 제인> 현실의 우리

꿈꿔야만 했던 이유

영화 <꿈의 제인>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가출 청소년들은 그들만의 새로운 가족을 이루고 지낸다. ⓒ<꿈의 제인> 스틸.



  한 소녀가 모텔방에서 뭔가를 끼적인다. 그 위로 조그맣게 읊조리는 목소리가 담담히 일어났던 일들과 심경을 이야기한다. 곧 그녀가 편지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는 소녀가 어떤 이에게 띄우는 편지로 시작한다. 


  소현은 가출 청소년이다. 같은 처지의 아이들이 탁자에 둘러앉아 키우던 거북이 등 자신이 목격했던 죽음의 경험을 털어놓는다. "넌 뭐 없어?" 소현이 머뭇머뭇 입을 뗀다. "저는 엄마요." 소현이 집을 나온 이유는 자신을 보살펴줄 보호자와 살아갈 공간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한때 소현을 돌봤던 정훈도 부담스럽다며 그녀에게서 도망쳤다. 어물어물 끝을 흐리는 소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만 간신히 알 수 있는 일들이다.


"안녕? 돌아왔구나?"  ⓒ<꿈의 제인> 스틸.



  그런 소현이 명료하게 말을 뱉는 순간은 수신인 없는 편지를 읽을 때뿐이다. 그녀는 이전에 정훈과 살던 모텔방에 돌아가 편지를 쓰고, 손목을 긋는다. 빨간 피가 욕조 가득 퍼지고 소현의 정신은 아득해진다. 그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린다. 문을 열면, 제인이 소현 앞에 나타난다. 그녀는 소현의 피를 멎게 하고 상처를 긁지 않도록 붕대 위에 X표를 그려준다. 그리고 소현이 자신의 '팸(패밀리)'에서 지내도록 한다.


  소현은 함께하는 것에 서툴다. 주머니 가득 담긴 초콜릿을 빼앗길까 두려워 혼자 대문 앞에 쭈그려 앉아 허겁지겁 입안에 욱여넣는다. 제인은 그런 소현을 나무라지 않고 그대로 품는다. 그녀는 지수, 대포, 쫑구, 그리고 소현에게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으면서 거처와 물질적 지원을 제공하고, 따뜻한 밥을 지어 먹인다. "어차피 어른이 되면 죽을 때까지 일만 할 테니까 벌써부터 돈을 벌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다", "불행한 인생 혼자 살 이유가 없으니 다 같이 사는 거"라 말하면서.


'엄마'는 결코 강하지 않다. 누구나와 마찬가지로 외롭고 약한 '사람'이다. ⓒ<꿈의 제인> 스틸.



 그러나 '보호자' 제인도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그녀는 정훈의 사랑을 얻지 못해 힘겹고 세상의 시선과 싸우느라 우울하다. 스스로 여성이라 믿지만 타인은 그녀의 몸을 증거로 내세우며 거짓말이라 손가락질한다. 제인은 약을 삼키는 등 위태로운 모습을 보이다가 끝내 창문 밖으로 몸을 던진다. 그녀가 죽고 제인 팸은 뿔뿔이 흩어진다. 소현은 다시 '아무도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곳'으로 돌아간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전했던 소현은 묻는다. "제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신가요?" 이후 펼쳐지는 상황은 '꿈의 제인'이 사라진 현실이다. 소현이 속한 팸은 어긋난 권위에 젖은 '아빠' 병욱과 그를 '아빠 새끼'라 부르며 억지로 따르는 아이들로 이뤄졌다. 새로 들어온 멤버 지수는 병욱에게 저항하다 감금당한 채 성을 착취당한다. 결국 지수는 창문에서 뛰어내려 자살한다. 


병욱 팸 아이들. 그들의 일상은 범죄로 점철되어있다. ⓒ<꿈의 제인> 스틸.



  악몽인 줄 알았던 제인과의 일상은 소현이 꿀 수 있었던 가장 달콤한 꿈이었다. 제인 팸은 소현이 가깝게 지내고 싶어 했지만 좌절됐던 아이들이다. 꿈의 제인은 소현이 죽음을 바라봤던 친모와 지수의 결합이다. 현실의 제인은 트랜스젠더 바에서 함께 일하던 정훈을 좋아했지만 그가 도망치자 종적을 감췄다. 소현과 제인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 제인이 무대 위에서 노래하고 미러볼이 반짝이는 조명 아래서 춤췄던 그 황홀경의 순간이 '꿈'의 밑그림이 된 것이다.


  소현은 같은 말을 반복하지만 현실이 드러난 뒤에야 비로소 그녀의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꿈의 제인>의 존재 자체가 극 중 꿈과 같다. 분명 영화가 세상에 나오기 이전에도 아이들은 거리를 방황했고 수많은 어른들이 그들을 목격했다. 신경 쓰고 싶지 않았기에 그들은 괜찮을 거라며 무관심을 합리화했다. 그렇게 중년의 남자는 소녀의 사정은 묻지 않고 화대를 지불했고, 고용주는 싼값에 노동력을 착취했다. 부모는 폭력을 가하거나 방치하는 등의 방법으로 아이들을 버렸다.  


어디서나 볼 수 있지만 알지 않으려 애쓰는. ⓒ<꿈의 제인> 스틸.



  영화는 어른과 아이 모두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다. 특정 대상을 '불쌍한 피해자'로 대상화해 동정한다든가 이상형을 치켜세움으로써 이외의 생을 나무라지 않는다. 제인이 9개뿐인 소현의 발가락을 보고선 자신의 고충을 들며 공감했던 것과 같은 화법이다. 갖지 못했지만(또는 잃었지만) 가진 듯 아프게 느껴지는 발가락. 스스로 가졌지만 부정당하는 성 정체성. 발가락과 성 정체성의 자리에 '행복'을 가져다 두어도 이상하지 않다. 


  삶의 행복은 그토록 오롯이 갖기 어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제인은, 소현은, 영화는 말한다. 피차 불행한 존재라면 적어도 타인을 배제하며 시시해지지는 말기를. 인생은 원래 재미없는지라, 불행은 태어난 순간부터 끝없이 늘어져있지만 행복이란 건 아주 작은 모래알처럼 드문드문 흩뿌려질 뿐이라고. 그래도 '우리' 죽지 말고 불행하게 오래오래 살자고. 살아서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또 만나 함께하자고. 어둠이 깊은 곳에서 빛은 더 강렬해지기에. 


"이런 개같이 불행한 인생 혼자 살아 뭐하니? 아무튼 그래서 다같이 사는거야."  ⓒ<꿈의 제인> 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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