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행코드의 씁쓸한 뒷맛
영화 <택시운전사>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념보다 인간.' 장훈 감독은 시대, 사회구조, 계급 등에서 비롯된 관념보다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중요시해왔다. 남한과 북한의 이념 속에서 아프게 피워낸 인간애를 조명한 <고지전>(2011)과 <의형제>(2010)가 그렇다.
장훈은 <택시운전사>(2017)에서도 역사를 이념없이 돌아보고자 했다. 영화는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와 그를 도운 택시운전사 김사복을 통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참상을 재현했다. 그러나 결과물은 전작들과 판이하게 다르다. 감정을 키우는 과정에서 이념은 물론 명분까지 지워버리는 우를 범했기 때문이다. 참담한 결과와 그로 인한 슬픔을 전시하되 투쟁의 이유와 과정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물론 이데올로기가 담긴 영화는 논란에 휩싸이기 쉬우며 만인에게 호감을 얻기 어렵다. 각기 다른 가치관을 가진 모두를 관객으로 모시려면, 즉 영화가 잘 팔리려면 이념을 지우는 게 편리하다. 굳이 머리 아픈 길을 가지 않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분명히 흥행할 것이다.
오프닝 시퀀스부터 흥행의 아이콘 송강호가 셀링 포인트를 착착 늘어놓는다. 만섭(송강호)은 어려운 형편에도 미래를 낙관하는 소시민이다. 아내는 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 그만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동료의 집에 세 들어 살며 눈칫밥을 먹고 다달이 생활비와 월세를 마련하기 위해 택시로 서울을 누빈다.
만섭은 학생 운동 탓에 도로가 통제되자 불만을 늘어놓는다. '지금이 옛날에 비해 얼마나 잘살게 됐는데 배가 불렀다'는 것이다. 폭력으로 제압당하는 대학생을 보면서는 '그러게, 하지 말라는 시위는 왜 해서 경찰에게 잡혀가냐'는 식이다. 해당 장면은 뒤따르는 130여분의 이야기를 축약적으로 설명한다. 만섭은 골목길을 종횡무진 다닐 만큼 뛰어난 운전 실력을 지녔고, 돈에 집착한다. 동시에 상황이 어려운 손님에게 택시 요금을 받지 않을 만큼 성품이 선하다.
이후 전개는 놀랍도록 단순하다. 만섭은 큰돈에 혹해 힌츠페터를 태우고 광주로 향한다. 만섭은 그곳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시민들을 목격한다. 시민들은 '우리도 우리한테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가만히 있었는데 자꾸 때린다'며 억울함을 호소한다. 거리로 나갔던 시민들이 한순간에 주검이 되어 돌아오지만 TV 뉴스에서는 '군인들이 폭동을 진압하다 목숨을 희생했다'는 말뿐이다. 마침내 만섭은 광주의 진실을 세계의 알리고자 한다. 힌츠페터와 그가 촬영한 필름을 지키기 위해 총성 가득한 거리로 나선다.
군인은 총을 쏘고 시민은 총을 맞는다. 군인은 최대한 건방지고 껄렁한 표정을 지으며 절대악을 실현한다.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고 시민은 그에 저항한다. 이 과정에서 '왜'는 없다. 만섭이 이유를 물으면 아주 순박한 표정으로 "모른다요. 우린 아무 짓도 안했지라." 따위의 대사를 뱉는 식이다. 장치적으로 사용하는 사투리와 태술(유해진), 재식(류준열) 등 전형적 역할(특히 류준열이 입으로 기타 소리를 낼 때)을 보다 보면 헛웃음이 절로 난다. 힌츠페터 역시 진실을 좇는 기자 대신 고추를 씹고 매워 어쩔 줄 모르는 '외국인'으로 소모된다.
피 흘리며 민주주의를 외쳤던 이들의 대의는, 만섭의 택시가 지나치는 풍경에 그친다. 영화는 시민들이 머리에 두른 띠, 거리 곳곳에 새겨진 '비상계엄 해지하라', '물러가라' 따위의 문구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그들의 몸을 꿰뚫는 총알, 뭉개진 청년의 얼굴, 유족의 울부짖음에만 흥미를 보인다. 군인에게 잔혹한 명령을 내렸던, 시민들이 물러나라 부르짖었던 그 부정한 권력은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
모든 투쟁과 희생은 스펙터클로서 알뜰히 이용되고 산화한다. 택시로 벽을 세워 군인들의 시야를 방해하고 부상자들을 구출하는 장면은 전쟁영화를 방불케 한다. 위태로운 비탈길에서 군용 트럭과 택시가 카체이싱을 벌이는 장면도 있다. 택시운전사들이 만섭을 보호하기 위해 펼치는 액션은 <매드 맥스> 또는 <분노의 질주>와 닮았다. 또한 죽음을 맞기 직전의 얼굴들을 클로즈업하며 공포와 사명이 뒤섞인 최후의 순간을 강조한다. 목숨을 건 항쟁은 화려한 볼거리 또는 신명 나는 오락거리로 전락한다.
만섭, 즉 영화는 끝까지 시민들이 갈망하는 민주주의를 알지 않으려 한다. 보편적인 고통과 감정에 호소할 뿐이다. 이념은 물론 의지와 명분을 지워버렸다. 만섭이 광주 시민들을 돕기 시작한 건 본인이 '빨갱이'라는 누명을 쓰고 폭력을 당한 후다. 서울의 대학생들과 광주의 시민들이 자신과 같은 억울함을 느꼈을 것이라 공감하고 나서야 마음을 움직인다. 이 가치중립적이다 못해 가치를 배제한 관점은 위험한 여지를 남긴다. 독재자, 나아가 모든 사건의 가해자가 '인간적인' 표정을 짓는 순간 모든 악행을 설득할 수 있다. (감독도 이를 의식했는지 군인의 차갑고 건조한 얼굴만을 담았다.)
광주의 진실을 세상에 알렸던 힌츠페터의 기자 정신, 그가 고발한 군사정권의 부패는 흐릿하다. 가장으로서 만섭이 갖는 고뇌, 광주 시민과의 추억에 가려 뒷전이 된다. 만섭의 이야기가 끝난 뒤에야, 눈을 감기 전까지 '김사복'(영화의 모티프이자 힌츠페터가 알고 있는 가명)을 찾았다던 실제 힌츠페터의 영상이 짧게 등장한다. 그는 "내 눈으로 진실을 보고 전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용감한 택시기사 김사복과 헌신적으로 도와준 광주의 젊은이들이 없었다면 다큐멘터리는 세상에 나올 수 없었다"며, "죽기 전 김사복을 꼭 만나고 싶다. 당신의 택시를 타고 변화한 대한민국을 구경하고 싶다"라고 말한다.
그의 모습은 영화에서 담지 못한 끈끈한 연대, 우정, 민주주의를 향한 갈망을 시사한다. 실제 이야기가 주는 힘은 그토록 강력하다. 영화는 그 이야기를 보이기 위한 흥미 유도에 그친다. 아픈 역사를 널리 알리고 경각심을 준다는 점은 높이 살 만하다. 관객이 크레딧이 나오기 전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고 그와 만나는 것, 극장을 나선 뒤에도 잊지 않고 역사를 되짚는 것. 이 두 가지 목적이 달성됐을 때 비로소 <택시운전사>는 유의미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