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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 Mar 27. 2017

<눈길> 소녀들의 봄은 온다

영화 <눈길>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일제에 맞서 대한독립만세를 목놓아 외쳤던 그 날에 한 편의 이야기가 안방에 찾아왔다. 그리고 2년 뒤 같은 날, 이야기는 극장에서 다시 한번 관객들을 맞이한다.


얼어붙은 강 위를 걷는 영애.


  <눈길>(2015)은 일제 침략 당시 일본군 위안부 사건을 다룬다. 여느 날과 다를 것 없는 하루를 보내던 종분과 영애는 느닷없이 '위안부'가 된다. 군인에 의해 사람은 지워지고 치욕스러운 이름의 도구만이 남는다. 빨래를 하고, 산책을 가고, 책을 읽던 평범한 아이들은 좁고 어두운 방에 갇혀 낯선 남성의 무차별적인 폭력을 받아내야만 한다.  


  일본군에게 소녀들은 최소의 유지 비용을 들이며 사용하다 가치가 다하면 폐기 처분할 자산에 불과하다. 총성이 그치고 겨우 목숨을 부지하지만, 악몽 같은 시간은 종전 후에도 끝나지 않는다.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노라 당당히 말할 수 없는 소녀들은 수치심과 증오를 가슴에 품은 채 숨어버린다. 편견에 사로잡힌 시선과 손가락질이 두려웠던 탓이다. 소녀들이 치러낸 총도 칼도 없는 전쟁이다. 


죽느니만도 못한 삶을, 그럼에도 살아가는 종분.


  그들이 잊히지 않는 기억과 지워지지 않는 흉터로 괴로워하는 동안 가해자들은 죄를 잊고 역사를 지운다. 누군가 울부짖기라도 하면, 비난의 화살은 엉뚱하게도 과거의 소녀들을 향한다. 일본군과 놀아나며 잘 먹고 잘 살지 않았냐고. 이미 더럽혀진 몸이라고.


  "잘못한 것 없어요. 창피한 일 아니에요." 움츠리는 종분 앞에 현재의 소녀, 은수가 나타난다.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아저씨들에게 술 따르는 일'을 해야만 했던 그녀가 종분 대신 화를 낸다. 종분 역시 은수가 아닌, 은수가 비행 청소년이라 불리게끔 한 어른에게 호통을 친다. 나쁜 사람 때문에 스스로 죄스러워 말라고, 과거와 현재의 소녀는 서로를 감싸 안는다.


거리로 내몰린 은수와 그녀를 안는 종분.


  앞서 위안부 문제를 소재 삼았던 영화 <귀향>은 민속 신앙에 기대어 비현실적인 한풀이를 보여주는 데에 그쳤다. 피해 사실을 적나라하게 전시하는 것으로 경각심을 주고자 했으나 의도와는 달리 짤막한 몇몇 장면이 '성폭행', '강간', '포르노' 따위로 분류되며 차가운 시선을 받기도 했다. 소녀들의 아픔을 영화적 스펙터클로 사용한 결과, 또 다른 고통을 불러온 것이다.


  대조적으로 <눈길>은 상처를 세심하게 어루만진다. 가해 현장에서 고개를 돌려, 그 이후의 삶을 바라본다. 왜 소녀들이 청년기를 지나 노인이 될 때까지도 피해 사실을 숨겼는지, 오랜 시간 심신이 피폐해져 감에도 처벌과 사과를 요구하지 못했는지 드러낸다. 또한 그들이 잊고 지내던 어떠한 권리를 시사한다. 목소리를 낼, 당당히 분노하고 요구할 권리를.


주체적으로 존재하는 소녀들.


  은수에게서 용기를 얻은 종분은 더 이상 숨지 않는다. 당당히 자신의 과거를 밝히고 집회에 나가 목소리를 높인다. 종분과 은수는 같은 땅에서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나아가 사람 대 사람으로서 연대한다. 소녀들은 모두 명백히 주체적인 존재다.


  <눈길>은 소녀들이 '아무것도 하지 못해 반드시 도움을 받아야 하는' 피해자의 굴레를 벗을 수 있도록 한다. 비당사자는 소녀들을 대신해 걷거나 업을 수 없다. 다만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이 걷는 길 위에 내려앉은 눈을 쓸어내는 일. 그렇게 차디찬 눈을 걷어내고 따스한 목화솜을 누벼가며 소녀들의 봄을 말한다.


들과 숲을 덮은 눈이 목화솜 이불 같다던 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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