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침묵의 시선>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침묵의 시선 The looks of silence>(2014)은 침묵하는 시선보다 침묵을 향한 시선에 가깝다. 백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그러나 누구도 공론화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영화는 끔찍한 사건보다 그 뒤를 잇는 침묵에 주목한다. 왜 조용해졌는가. 무엇을 가리기 위해 침묵의 장막을 쳐놓았는가.
1965년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장군은 '공산주의자의 쿠데타 진압'의 명목으로 군부에 반대하는 이들을 잔혹하게 살해했다. 이후 그는 비상사태를 선포하며 정권을 잡았고, 1968년 스스로 대통령이 되었다. 도로, 전력, 관개 시설을 건설한 근대화 정책 덕에 인도네시아의 경제는 크게 성장했지만, 정치부패는 극심했다. 그는 1998년 하야할 때까지 30여 년간 철저한 독재 정치를 펼쳤다.
주목할 점은 이 모든 과정이 수하르토 혼자서는 절대 이뤄낼 수 없는 역사라는 것이다. 인도네시아 안팎의 도움이 컸다. 그의 군대는 곳곳에 민간 학살단을 조직하고 명령을 내리며 간접적으로 움직였다. 다시 말해, 국민이 국민을 직접 죽이도록 했다. 이념으로 가르고 서로 죽이게 함으로써 성립한, 근대화의 가장 큰 이념이 '민주주의'인 것은 참으로 모순적인 일이다. 끔찍한 살인과 가학행위는 나라를 위해 일했다는 사탕발림과 함께 '애국'으로 포장된다. 그들은 스스로 헤게모니의 피해자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폭력의 가해자, 즉 부당한 권력의 공범이 되고 만다.
헤게모니는 대물림을 통해 재생산된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악행을 일삼았으니 죽어 마땅했다'라고 교육받는다. 학살단이 죽인 것은 사람이 아니었다고 설명한다. 그들은 이슬람교에서 금지하는 모든 것을 저지른, 신을 배반하고 국가를 파멸시키려 했던 악마를 퇴치했다는 것이다. 미국의 적을 무찔러줬으니 고마워하라는 공치사까지 한다. 실제로 미국은 인도네시아의 대량학살을 '공산주의를 물리친 승리'로 치켜세웠다. 타임지, 뉴욕타임스 등이 해당 사건을 대서특필하며 인도네시아의 '근대화'를 지지한 워싱턴 정부에게 찬사를 보낼 정도였다. 현지 중국인을 포함 100만 명 이상이 학살당했지만 추도와 반성은커녕 논란조차 없었다.
이 기형적 고요를 고찰하는 실마리는 희생자 람리의 존재다. 람리는 공산주의자로 몰려 죽었을 것이라 짐작되는 수많은 실종자 중 유일하게 이름과 죽음이 확인된 인물이다. 람리의 부모는 그가 한없이 선량한 아들이었다고 증언한다. 영화는 그들의 입을 통해 국가가 선량한 국민에게 극악무도한 공산주의자의 허상을 씌웠음을 지적한다. 람리의 동생 아디는 그 진실을 가지고 직접 가해자들을 찾아간다. '당신은 영웅이 아니라 권력에 이용된 살인자일 뿐이며 당신이 죽인 악마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다' 알리기 위해서.
학살 가담자들은 람리를 죽였다고 인정하지만 대의를 위한 일이었다며 죄책감을 거부한다. 오히려 다 지난 일을 들춰 불편하게 만든다고 꾸짖고, 옛날 같았으면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라 위협한다. 웃으며 학살 이야기를 하다가도 아디가 람리의 동생임을 안 순간 차갑게 돌변한다. 학살은 그들의 자랑거리인 동시에 쉬쉬해야 할 일이다. 람리로 대표되는 희생자들이 '소문과 달리' 실제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려지면, 그들이 지켜온 신념과 자부심이 무너져 내리기 때문이다. 평범한 이웃을 죽였다는 진실은 본인에게도 가족들에게도 숨긴 채 살아간다.
그들의 강력한 자기 최면은 '중국인의 피'에서도 드러난다. "그때 나와 함께 일했던 동료 중 지금 미친 사람이 아주 많아. 밤낮으로 기도를 한다고 숲에 들어가기도 하고. 다행히 난 미치지 않았어. 자기가 죽인 중국인의 피를 마시면 미치지 않거든. 피를 마신 사람들은 미치지 않았지." 인간으로서의 삶을 잃은 그들의 모습은 '대(大)를 위해 짓밟힌 소(小)'다. 터무니없는 미신을 믿을 정도로 무지한 자들이 여전히 진실을 모르고 있거나, 자신이 죽인 사람의 피를 마실 정도로 염치없는 자들만이 진실을 알고서도 멀쩡히 살 수 있거나. 그렇게 인도네시아 사회 내부의 침묵이 지켜져 왔다.
피해자들 또한 스스로 입을 떼지 못했다. 람리가 상징하는 인도네시아의 학살은 부끄러운 역사 이전에 '정부를 거스른 결과를 보여주는 본보기'로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미국이 이끄는 거대한 세계 흐름, 근대화에 대항한다면 이토록 비참한 결말을 맞을 것이라는 협박이다. 너무나 거대한 체계가 작은 개인의 슬픔을 감시하려 버티고 서있는 형국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었고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이들은 죽지 않기 위해 죽은 듯 살아야 했다. 수많은 람리의 부모가 비극을 가슴에 묻고 아들에게 칼을 찔러 넣었을 이웃과 마주하며 평생을 지냈다. 그 덕에 독재자는 정권을 유지했고, 강대국은 여타 이데올로기를 죽여가며 세계를 장악했다.
부당한 폭력과 그 이후 뒤따르는 침묵은 개별 국가는 물론 국제 사회에도 존재한다. 앞서 벌어졌던 세계의 수많은 전쟁과 전쟁이라는 이름의 학살 역시 권력관계와 결부된다. 영토 탈환을 위해 벌어진 학살은 야만을 문명화한다는 명분을 내세웠고, 쏘아 올린 미사일은 민간 지역에 떨어져 정의 대신 석유를 구했다. 그러나 약체의 희생은 '적의 소탕'으로 단언된다. 강자는 이견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권력자가 공표한 것에 토를 달았다간 또 다른 적이 될 수 있다. 말을 보탤 수 없으니 침묵이 찾아올 수밖에.
인도네시아의 자리에 대한민국이 와도 이야기는 다르지 않다. 일제강점기-미군정으로 이어지며 가해자는 강자로 남아 권력을 유지했고 끊임없이 공범과 피해자를 양산해낸 결과, 일제의 만행에 대해 사과를 받아내기도 처벌하기도 어렵다. 두 강대국이 작은 나라에서 이념 다툼을 벌였지만 모든 책임은 분단된 반도의 몫으로 남겨졌다. 빨갱이라는 오명 뒤에 따라오는 아픈 역사들도 마찬가지다. 피해자와 피해사실이 명백하지만 그것뿐이다. 잘잘못을 따진 뒤 무너진 질서를 회복해 비극의 반복을 막는, 마땅히 거쳐야 할 다음 과정이 없다.
요컨대 평온한듯한 고요는 권력을 숨기는 묵살로 점철돼있다. <침묵의 시선>은 이러한 현상을 바라보고 실체를 드러냄으로써 침묵을 깨트린다. 감독 조슈아 오펜하이머가 "거대한 거짓말의 틈에 균열을 일으킬 쐐기를 박는 작업"이라 말했듯, 헤게모니 속에서 당연했던 것들을 반전시킨다. 영화 이후 파생된 움직임 또한 고요함 속에서 소리를 낼 것이다. 불편한 소음이 모이면 주장이 되고, 정당한 사회적 외침이 된다. 막대한 권력에 가하는 작은 균열, 그 이후 찾아오는 것이 적막인지 생동하는 정의인지는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