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문화 읽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란 Aug 18. 2017

<미행> 위험한 미로 끝 섬뜩한 야망

될성부른 놀란의 떡잎

영화 <미행>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독창적인 편집과 서사구조로써 이야기를 완성하는 감독이다. 달리 말해, 그의 영화는 쉽지 않다. 영화의 복잡한 플롯은 관객이 머리를 감싸 쥐며 괴로워하게 만들고 재관람을 유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본래 목적은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에 있다. 이야기의 방식일 뿐 아니라 이야기 그 자체가 된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건축가처럼 정교한 설계도를 그리고 자재를 골라 정성스레 쌓아가며 한 편의 영화를 짓는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던가, 크리스토퍼 놀란의 첫 장편작인 <미행 Following>(1998)은 그의 작품 세계를 관찰하기에 아주 적합한 영화다. 흑백과 플래시백을 이용해 단기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는 주인공의 내면을 가시화한 <메멘토>부터, 잔교-바다-하늘 세 시점의 교차 편집을 통해 공간의 폐쇄성과 시간의 불안정성을 공감각적으로 전달한 <덩케르크>까지. 그의 걸작들은 모두 69분짜리 흑백영화, <미행>으로부터 시작됐다.


ⓒIMDb.



  영화는 의료용 장갑을 낀 손이 작은 나무 '상자'에 어떤 여성의 사진, 지폐, 해마, 장신구 등을 정성스레 채워 넣는 장면으로 막을 연다. 탁 소리가 나도록 상자 뚜껑을 닫으면 작가 지망생 빌이 모습을 드러낸다. 불특정 다수의 뒤를 따라다니며 소설의 소재를 그의 일상 위로 자신을 설명하는 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짧은 머리에 얻어맞은 듯 만신창이가 된 빌이 누군가와 마주 앉아 대화하고 있는 상황.


  빌은 자신만의 미행 규칙-한 사람을 정해놓지 말고 무작위로 미행할 것-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곧 규칙을 어기고 사진 속 여성을 찾아 나서는 모습으로 덮인다. 또한 커다란 가방을 든 남자를 여러 번 쫓아다니는 빌, 입에 장갑을 물고 쓰러진 빌, 그리고 현재 목소리를 내고 있는 빌까지. 그리고 그 사이에 낯선 순간들이 혼란스럽게 흘러든다.  





 관객이 빌의 머리 길이, 차림새, 멍든 얼굴 따위의 단서로 전후관계를 정리하고 있을 때 영화는 사내를 쫓던 장발의 빌에게 집중한다. 남자는 빌의 미행을 눈치채고 먼저 그에게 다가가 자신을 콥이라고 소개한다. 콥은 타인의 집에 몰래 침입해 인생을 들여다보고, 물건을 훔치거나 망가뜨리면서 그들을 흔들어 놓는다. 빌은 콥의 철학에 감응하고 그를 닮고자 한다.


  다음은 사진 속 여자의 뒤를 밟는 멀끔한 모습의 빌이다. 그는 자신을 대니얼 로이드라고 소개하며 홀로 술을 마시는 여자에게 접근한다. 여자는 전 연인이 지켜보고 있다며 자리를 옮겨 빌의 집으로 향한다. 그녀는 얼마 전 집에 도둑이 들었다 털어놓고, 빌은 그녀의 심경을 집요하게 캐묻는다. 계속해서 그녀를 만나고 싶어 하는 걸로 보아 빌은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


  만신창이로 쓰러져있던 빌은 여자의 전 연인을 미행한다. 그는 콥으로 추정되는 남자에게 전화를 걸어 조언을 얻는다. 그에 따라 빌은 '방어'를 위해 망치를 챙겨 나서고, 여자가 홀로 술을 마시던 가게에 몰래 들어가 금고를 턴다. 당장 도망쳐야 할 긴박한 상황인데도 가방을 챙겨 오지 않은 탓에 돈다발을 몸에 대고 테이프를 칭칭 감아 붙인다. 욕심만 앞선 그의 서툰 행동은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린다.





  뒤엉켜 등장했던 세 명의 빌은 오프닝의 상자가 다시 나타난 시점에서 나란히 놓인다. 콥이 노린 범행 장소는 사진 속 여성의 집이었고, 빌은 그곳에서 훔친 '상자'를 살피다 그녀에게 빠져든다. 빌이 위험을 감수하고 금고를 찾았던 이유도 그녀가 전 연인에게서 벗어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각 시점의 선후가 명료해지는 순간이다. 이제 누군가에게 자신의 미행을 설명하던 빌이 남는다.


  결국 모든 규칙을 어긴 빌은 그의 말 그대로 '곤경에 빠졌다'. 여성은 애초부터 한패였다. 콥은 자신의 살인 혐의를 뒤집어 씌우기 위해 의도적으로 빌에게 접근했고 대니얼 로이드의 카드를 건넸다. 여성은 콥을 돕기 위해 빌을 속이고 금고 털이를 유도했다. 결국 빌은 경찰에 잡혀 취조를 당하고 모든 상황을 털어놓는다. 영화 초반, 규칙을 설명하던 빌의 목소리는 진술이었다.



그가 그녀를  미행하거나, 추종하거나. ⓒ<미행> 스틸.



  일단락되는 듯했던 이야기는 '콥이라는 인물은 존재하지 않으며, 여자는 시신으로 발견됐다'는 형사의 말에 한번 더 뒤집힌다. 콥은 조직의 보스를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여자의 속셈을 눈치채고 그녀를 죽일 계획을 세웠다. 그가 빌에게 덮어 씌우려 했던 누명은 미래에 저지를 살인에 대한 것이었다. 콥은 용의주도하게 여성을 이용하고 모든 정황과 증거를 빌에게 남겨둠으로써 자신을 지웠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콥의 계략이 완전히 밝혀지고 나서야 그가 복잡한 서사구조의 지배자이자 열쇠임이 드러난다. 내내 주체인 듯 보였던 빌은 대상 또는 수단에 불과하다. 콥만이 서사의 타임라인을 꿰고 있다. 빌에게 발생한 모든 상황, 이에 따라 그가 취한 행동, 그가 느낀 감정, 앞으로 처할 일들까지 전부 콥이 만들어낸 세상이지만 정작 콥은 이야기에서 흔적 없이 사라졌다.



오프닝 속 '그 상자'. ⓒ<미행> 스틸.



  오프닝에서 여러 장치들을 상자에 담아둔 콥은 영화를 만든 감독으로 바꿔 말할 수 있다. 빌이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은 콥이 의도한 것들이며, 그 사실을 깨달은 뒤에도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관객은 눈앞의 서사를 벗어날 도리가 없다. 미로를 헤매다 찾게 되는 것은 설계자가 늘어뜨린 실타래뿐이고 그 끝엔 감독이 창조한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 창작자이자 절대자를 따르는(following) 영화 세계. 크리스토퍼 놀란은 이토록 당찬 야심을 세상에 알린 것이다. 그것도 무려 데뷔작에서.


  <미행>은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인생을 설명하는 오프닝 시퀀스로서 손색없는 작품이다. 오프닝 시퀀스는 대개 이후 펼쳐질 영화 전반을 아우르며 '앞으로 이런 이야기를 해줄 거야'라는 선전포고의 기능을 한다. 현재 세계적으로 호평받는크리스토퍼 놀란의 플롯, 독특한 구조, 치밀한 편집이 모두 <미행>에 담겨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제작비 6천 달러에 주말에만 최소 인원으로 촬영하는 악조건에서도 역량을 발휘했고 자신의 가능성을 증명해냈다. 윤택한 환경을 갖춘 그가 얼마나 더 무시무시해질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는 이미 시작됐다는 것. 그의 세계에서 빠져나오기 어려울 것이라 장담할 수 있다.



의도하진 않았겠으나, 스치듯 등장하는 배트맨 마크가 이후 연출한 배트맨 시리즈를 연상케 하기도. ⓒ<미행> 스틸.





매거진의 이전글 <수면의 과학> 유의미한 개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