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화차>(2012)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결혼을 앞둔 선영과 문호. 어느 날 갑자기, 선영이 연락도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문호는 발을 동동 구르며 그녀를 찾아 헤맨다. 그러나 문호가 잡으려 할수록 선영은 희미해진다. 이름, 이력, 필적 등 선영을 둘러싼 모든 단서들이 그녀가 '가짜'라고 말한다.
문호는 전직 형사인 사촌 형 종근에게 선영을 찾아달라 요청한다. 종근의 끈질긴 추적 끝에 문호가 사랑했던 여자의 실체가 드러난다. 경선이라는 이름의 여인이 진짜 선영을 죽인 뒤 그녀의 신분을 빼앗아 살고 있었던 것. 경선은 또다시 살인을 저지르려다 경찰에 발각되고, 건물 옥상에서 투신해 목숨을 잃는다.
영화는 경선을 뒤쫓는 종근의 행적에 따라 단서를 던져주고 범인을 유추하게끔 하는, 탐정 영화의 장르적 특성을 따른다. 여기에 보다 친밀한 문호의 시선을 열어둔다. (원작 소설에는 없는) 경선을 바라보는 방법을 하나 더 제시한 셈이다. 문호는 자신의 감정과 경험을 기억하며, 종근은 실질적인 증거를 바탕으로 경선이란 인물을 정의한다.
어떻게 바라보고 무엇을 믿을 것인가. 경선을 향한 두 인물의 시선은 경선의 이야기, 즉 영화를 향한 관객의 관점에 빗댈 수 있다. 경선에 공감하며 둘러싼 환경을 현실에 대입하거나, 현실에서 비롯돼 놓인 영화적 장치들을 분석하거나. 사실상 영화는 전자에 무게를 싣고, 가까운 이웃이자 사회 구성원으로서 소외된 약자를 상기시킨다. 따라서 영화 밖의 이 글은 영화에 뿌려진 객관적 단서를 발견하고 그 안에 스며든 쟁점을 고찰하고자 한다.
영화의 공간은 고립돼있다. 문호가 경선의 흔적을 따라 찾은 마산, 제천 등의 촌락은 도시에서 새로운 삶을 꿈꾸던 경선과 선영의 기억 속에서 봉인된 곳이다. 과거의 비극을 품은 공간은 현재의 개입을 극렬히 거부한다. 인적이 드문 골목은 한없이 조용하고 주민들은 도시에서 온 문호를 경계하고 적대한다.
'이웃 간의 정'은 가정사를 훤히 꿰뚫고 있을 만큼 친밀하지만 정작 폭력과 소외 앞에서 방관하는 편리한 간섭에 불과하다. 또한 폐쇄적인 집단 내에서 찍힌 낙인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흐려지지 않는다. 해당 장소에서 경선과 선영은 언제까지고 '불쌍한 누구 집 딸'로 기억된다.
촌락이 닫힌 공간이라면 도시는 열린 공간이다. 영화의 주요 장소인 용산역은 시작과 끝이 반복되는 도시를 대표한다. 기차는 오가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실어 나르고, 매일 누군가의 보금자리가 무너지며 그 위엔 새로운 건물이 세워진다. 무엇이 사라지든 새롭게 발생하는 것들이 얼른 자리를 채운다.
상실이 일상화된 도시에서는 기억되지 않는다. 관계없이 고립된 개인은 언제든 사라질 수 있다. 한 노인의 변사체가 반년 넘게 부패되도록 알지 못하는 사회에서, 개인의 존재를 구성하는 건 행정 기록과 몇몇 숫자뿐이다. 이토록 지독히 차가운 도시에서 경선은 아무도 모르게 자신과 다른 여성들을 죽일 수 있었다.
공권력은 자본 앞에서 몰락했다. 종근은 뇌물 수수가 발각돼 실직한 이후 별다른 소득 없이 하루하루를 연명한다. 그의 첫 등장은 편의점에서 통장 잔액을 확인하는 장면이다. 종근은 턱없이 적은 액수에 실망하던 중 몰래 맥주를 훔치는 청년을 목격한다. 그는 직원을 속이고 편의점 밖으로 나온 청년에게 고함을 치며 훈계하지만 청년은 도주해버린다.
종근의 정의감은 알량하다. 그는 청년을 현장에서 막지 않는다. 청년이 절도범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혼쭐낼뿐이다. 경선의 실종에 심드렁했던 종근이 호기심을 갖게 된 시점도 그녀에게서 살인 혐의를 발견한 순간이다. 응징에 국한된 정의 실현은 사전 방지보다 사후 처벌을 중요시 여기는, 악을 만들고야 마는 사회를 시사한다.
범인 잡기에만 혈안이 된 종근은 당장의 밥벌이를 뒷전에 둔다. 아내가 수십 통의 전화를 걸지만 받지 않는다. 경선, 선영, 그들의 어머니… 종근은 무능한 가장의 부채를 떠안고 살다 파국으로 치달은 여인들의 뒤를 쫓으면서도 정작 자신의 뒤에서 허덕이는 아내를 보지 못한다.
문호가 경선을 감정적으로 이해하고 재기를 돕는 데 반해 종근은 경선을 동정하면서도 '한낱 범죄자'라는 주홍글씨를 새긴다. 겨우 얻은 직장 대신 경선의 검거 현장을 택한 종근. 화차의 그늘이 아내에게 드리워지지만, 자위적 성과에 눈먼 종근과 그가 대표하는 구조는 언제나 그랬듯 막지 않는다.
[화차](火車) : 악행을 저지른 망자를 지옥에 싣고 가는 일본 전설 속의 불수레. 한 번 올라탄 자는 두 번 다시 내릴 수 없다.
경선의 이야기는 (원작 소설의 배경이 일본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의 악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앞서 다룬 배경, 틀, 공간, 구조는 '사회'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개인은 폐쇄적인 촌락에서 고립되고, 유동하는 도시에서 소외된다. 공익을 추구해야 할 권력은 사사로운 잇속 챙기기에 급급하다.
그 밖에도 버젓이 성행하는 강제 성매매, 경제 위기로 무너진 가정, 가장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도망친 아버지, 사채업자에게 붙잡혀 매춘을 해야 했던 어머니와 딸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강압적인 아버지와, 부를 물려받은 대신 그에게 굴복해야 하는 아들이 있다.
곳곳의 비극이 낯설지 않은 이유는 이 모든 것들이 우리 사회, 현대 사회와 전통 사회의 문제를 모두 가진 이중 위험 사회의 일면인 까닭이다. 부의 대물림, 불안정한 경제체제, 금융의 위험성, 인간 소외, 가부장제, 지역 격차, 사회 안전망 부재 등 이곳은 어느 때보다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
이제, 왜 그녀는 악인이 되어 불수레에 올랐나, 라는 물음을 뒤집어볼 수 있다. 모두가 악인이 될 수밖에 없는 불수레에 타고 있던 것은 아닐까. 청년층이 현재를 자조하며 부르는 말은 '헬조선(Hell과 조선의 합성어)'이다. 지옥을 향해 질주한다던 화차의 출발과 종착은 전부 이곳에서 이뤄졌다. 그녀를 멀찍이서 바라만 보기엔, 지옥은 이미 눈앞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