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문화 읽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란 Feb 02. 2018

<엘리펀트>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걸작의 함정

 영화 <엘리펀트>(2003)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평범한 고등학생 두 명이 학교에서 무차별적으로 총을 쏴 13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24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는 1999년 미국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이 참혹한 사건을 소재로 삼는다(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럼바인> 역시 동일한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는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과 황금종려상을 모두 수상하며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한 작품이 두 부문에서 상을 받는 일은 극히 이례적인 일로, 그만큼 영화는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현재까지도 '21세기 반드시 봐야 할 영화', '최고의 영화 100선' 등 각종 언론이나 비평가의 선별작에서 빠지지 않는다. 무엇이 <엘리펀트>를 '대단'하게 만들었을까.



존과 일리아스, 그리고 미셸의 시간이 중첩되는 순간. ⓒ<엘리펀트> 스틸.



  <엘리펀트>가 가진 매력은 시간의 중첩이다. 몇몇 인물의 시점을 롱테이크로 번갈아 따라가면서 각각이 공유하는 특정한 순간을 반복하게끔 한다. 숏과 숏 사이 시간의 틈으로 계속 새어나가는 플롯은 사건의 전개를 더디게 하고픈, 참사 이전의 시간에 계속 머무르고자 하는 의식이 깃들어있다.


  1.33:1의 화면비 또한 중한 요소로 꼽힌다. 스크린보다는 옛날식 TV, 비디오, 폴라로이드 카메라에 가까운 비율이다. 가로폭이 좁은 화면은 시야를 좁혀, 계속해서 바뀌는 중심인물에 집중하는 것을 돕는다. 또,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제한적인 환경에서 판단하게 함으로써 기민함을 억제하고 단절시킨다



'그날'을 준비하는 에릭과 알렉스. ⓒ<엘리펀트> 스틸.



  감독은 사건의 인과를 단정 짓지 않고 끊임없이 정황을 흩뿌린다. 가해자 에릭과 알렉스는 마릴린 맨슨의 음악과 파시즘에 빠져있었다. 에릭은 잔인한 총 게임을 즐겼으며 학교에서 배척하는 동성애 성향을 가졌다. 알렉스는 같은 반 학우에게 괴롭힘을 당했고 베토벤의 '월광'을 연습 중이었다. 어른들은 위험한 무기를 무분별하게 판매했고, 부모와 선생은 그들에게 무관심했다.


  시간을 다루는 제의적 방식이나, 하나의 특징을 범죄의 요인으로 몰지 않는다는 점에서 <엘리펀트>는 윤리적인 영화라고 평가받는다. 영화의 제목도 모두 알고 있지만 너무도 커다랗기에 외면하는 '방 안의 코끼리' 문제, 또는 '맹인들은 코끼리의 일부만을 만지고선 그것이 코끼리의 전부라 생각한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그러나 영화에는 한 마리의 코끼리가 더 있다.



방 안의 코끼리, 맹인의 코끼리, 그리고.... ⓒ<엘리펀트> 스틸.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미국의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프레이밍 효과를 설명하면서 코끼리 예시를 사용한다. 누군가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한다면, 청자는 그의 지시를 따르든 말든 이미 '코끼리'라는 존재를 상기해버린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엘리펀트>는 가치를 배제하는 방법으로 또 다른 가치를 심고 있다.


  비극적 사건을 스펙터클로 만들지 않으려 한 연출 와중, 변칙적으로 미셸과 베니를 적나라하게 전시한다. 두 사람은 각각 여성과 흑인으로 약자에 속한다. 이는 (에릭을 희롱한 것으로 추측되는 교장을 포함해) 악인이나 권력자만이 총에 맞아 죽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리지만, 동시에 여러 죽음 중 그들만을 전시함으로써 선별적인 폭력을 가한다. 의도했다면 악랄한 거고 몰랐다면 안일한 거다.



위험을 앞둔 브리태니, 조든, 니콜. ⓒ<엘리펀트> 스틸.



  브리태니, 조든, 니콜은 몰려다니며 다른 여자애를 흉보고, 한두 입 끼적인 점심을 변기에 게워내고, 거울 앞에서 화장을 고치다가 총에 맞는다. 세 명의 인물은 각각 독립적인 테이크를 갖지 못한 채 여느 영화와 다르지 않은 '전형적인 미국 여고생'으로 묶여버린다. (글쎄, 이런 묘사의 작품이 아무런 문제 없이 칸 영화제 2관왕을 차지했다면 <퀸카로 살아남는 법>(2004)을 재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너무도 고루하지 않나. 흥미로운 롱테이크. 오프닝과 엔딩의 비장한 수미상관. 과감한 편집. 연기 경력이 전무한 학생들을 데려다가 본명 그대로 출연시킨 '날 것'의 느낌. 사소하고 세심한 개성 표현. 이 모든 매력을 상쇄할 만큼 상투적이고 심심하다. 결정적으로, 윤리적 태도에 꽤 편협한 '예외'가 있음에도 극찬을 받은 점이 의문스럽다.  



미셸과 베니. ⓒ<엘리펀트> 스틸.



  감독이 제시한 산발적 정황에 덧입힌 어렴풋한 적개심은 얼마든지 '그럴만한 이유'로 왜곡될 수 있다. 역시 총 게임은 위험하다, 별 볼 일 없는 학생이 왕따를 당한다 따위의 도출이 에릭과 알렉스에게 범죄에 대한 적합성을, 미셸과 베니 등에게는 피해자로서의 전형성을 부여한다. 작품이 추구하는 방향과 사유가 정반대로 흐르게 된다.


  틀의 문제에서 자유로운 영화가 얼마나 있겠냐만은. 울타리를 치지 않으려는 듯하면서 유리벽을 세우는 건 대놓고 프레임을 보여주는 것보다 훨씬 교묘하고 위험하다. 요컨대 표면적으로 윤리적인 미학을 보이며 호평받는 영화가 사실은 썩 대단치 않을 수 있다. 권위에 눈이 가려 또 하나의 코끼리를 놓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버드맨> 나락으로 향하는 날갯짓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