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하고 아름다운 무지(無知)의 삶
영화 <버드맨>(2014)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영화 <버드맨(Birdman)>은 레이먼드 카버의 시 'Late Fragment'로 막을 연다. 인용된 구절에서는 사랑받기를, 스스로 사랑받고 있음을 알길 원했던 누군가가 삶을 회고한다.
And did you get what you wanted from this life, even so?
I did.
And what did you want?
To call myself beloved, to feel myself beloved on the earth.
익히 알고 있는 제목, 'birdman'이 나타난 이후엔 생소한 몇 개의 단어들이 음흉하게 떠올랐다 사라진다. 'or [the unexpected virtue of ignorance]'. 이 영화의 제목은 '버드맨'이면서 '무지의 예기치 못한 미덕'이라는 것이다. '무지의 예기치 못한 미덕'은 다른 이름으로 대체할 수 있다. 버드맨의 뒤에서 알게 모르게 존재했던 남자, '리건 톰슨(마이클 키튼)'. 앞서 삶을 회고했던 주인공일 것이다.
버드맨 또는 리건
리건은 버드맨이었다. 그는 고등학교 연극반에서 연기를 했던 때에 존경하는 극작가에게 칭찬을 받고서 배우를 꿈꿨다. 할리우드에 진출한 그는 히어로 무비의 주인공을 맡았고, 영화가 크게 성공한 덕에 여러 속편에도 출연할 수 있었다. 캐릭터의 인기는 남자에게 부와 명예를 가져다줬다. 그는 세계를 구한 영웅이었고 지구에서 가장 사랑받는 존재였다.
리건은 버드맨이 아니었다. 그는 젊은 날 인기에 취해 많은 것을 져버렸다. 아내를 두고서 수많은 여자들과 밤을 보냈고 방황하는 딸아이를 방치했다. 세상이 그를 완전히 잊었을쯤 그는 연극을 만들고 무대에 올랐다. 배우들은 형편없는 연기를 해댔고 평단은 그의 무지를 조롱 했다. 끊임없는 버드맨의 환청과 망상에 시달리던 그는 자신의 머리에 총을 쐈다.
리건은 늘 사랑을 갈구했지만 모두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건 버드맨이었다. 진짜 히어로가 되기엔 커다란 날개나 초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버드맨으로부터 벗어나 온전한 자아로 존재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리건이 하는 일은 언제나 엉뚱한 방향으로 흘렀고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았다. 바다에 뛰어든 리건 대신 그를 쏜 해파리가 죽어버렸고, 머리에 쏜 총알은 관자놀이를 비켜가 코를 맞췄다.
일생동안 얻고자 버둥거렸던 것들이 생을 포기하고 나서야 너무도 쉽게 손에 잡혔다. 목숨을 끊으려 했던 그의 행위는 비평가에 의해 '무대 위에서 피로써 새긴 진정한 예술'이 됐다. 마침내 리건은 자신을 따라다녔던 버드맨에게 안녕을 고했다. 그는 과거에 대한 미련과 자신을 구속했던 타인의 잣대를 털어버리고 창공으로 뛰어들었다. 이후 지상의 누구도 그를 다시 볼 수 없었다.
끝나지 않는 무지의 삶
<버드맨>은 영화 전체를 하나의 롱테이크 장면처럼 보여주며 줄곧 무지(無知)로 가득한 삶을 표현한다. 리건은 장미를 싫어하지만 그의 대기실엔 장미가 놓인다. 큰돈을 들여 영입한 배우는 공연 중 행패를 부리고, 불운하게 겪은 망신은 뜻밖의 연극 홍보가 된다. 극장 근처 꽃집에서 장미만 팔 줄은 몰랐듯, 모든 사건들은 누구도 답을 알 수 없기에 비롯된 일이다.
'A thing is a thing, not what is said of that thing'. 리건의 분장실 거울엔 그저 그 자체로 존재할 뿐, 외부의 틀에 의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글귀가 붙어있다. 하지만 그 자체로 존재하는 방법을 누가 알 수 있겠나. '나'가 뭔지도 모르는데, 타인의 의견이나 학습된 가치를 배제하고 '나'를 구성할 수는 없다. 특별하다는 리건의 말에 부흥하지 못해 방황하는 딸 샘(엠마 스톤), 역할이 주어진 대본과 그를 바라보는 관객이 있을 때에만 진짜로서 존재하는 배우 마이크(에드워드 노튼)도 마찬가지다. 삶의 인과, 운명, 우주의 이치…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도 모를 그것에 대해 누구라도 무지할 수밖에 없다.
버드맨을 벗어났거나 버드맨으로 거듭났거나. 리건의 마지막 도약은 비상인 동시에 추락이다. 가발을 벗은 그의 초라한 모습은 깃털이 듬성듬성 빠져버린 대머리 독수리를 연상케 한다. 리건은 얼굴에 덕지덕지 붙은 붕대를 떼어내고 버드맨에게서 멀어지지만,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변형된 코와 눈가까지 번진 보랏빛 피멍은 버드맨의 가면과 꼭 닮은 모습이다. 버드맨을 벗어던진 의지와 달리 그는 여전히 버드맨으로서 날개를 편다. 그 끝은 무지의 삶을 끝낸 리건만이 알 것이다.
리건의 결말을 바라보는 것은 그가 흘린 피를 예술로 칭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부질없는 포장인지 지극히 객관적인 추론인지 알 수 없다. 이토록 부지런히 날갯짓해도 푸른 하늘에 닿는단 보장이 없다. 이카루스는 날개를 잃고 심해에 처박혔으니까. 다만 '모르는 것 투성이의 삶'에서 사랑받기 위해 단어와 단어 사이에 의미를 부여하고 장면을 해체하며 고민과 해석을 거듭할 뿐이다.
<버드맨>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깃털이 다 빠지도록 팔을 흔드는 일, 실패와 좌절의 나락에서 퍼덕거리는 일이 살아가는 모두의 일이라 말한다. 그렇게 가닿은 무지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