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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 Apr 20. 2018

<레디 플레이어 원> 선생님, 전 아직 준비가

안 됐는데요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2018)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최근작 <레디 플레이어 원>은 분명 재미있는 영화다. 일단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볼거리가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다. 직관적인 플롯과 명확한 캐릭터는 누구나 쉽게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대중문화를 켜켜이 쌓아 <레디 플레이어 원>이라는 작품을, 또 하나의 대중문화를 만들어냈다. 감독이 바로 직전에 연출한 <더 포스트>(2017)를 생각하면 더 놀라울 수밖에 없다. 그는 양극단을 자유롭게 오가며 '상업영화의 거장'다운 역령을 과시했다. 당연히 평단은 그의 작품에 찬사를 보냈고 대중은 열광했다.   


  그러나 필자는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아주 좋은 오락 영화를 감상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훌륭'한지는 모르겠다고 할까. 4DX로 감상하지 않았더라면 재미는 더 떨어졌을 것이다. 요컨대 덕후가 되지 못한 자가 바라보는 <레디 플레이어 원>은 꽤 아쉬운 구석이 많다.



- 이스터에그가 다 했네


누가 이스터에그에 대해 묻는다면 고개를 들어 이 영화를 보게 하라. ⓒ<레디 플레이어 원> 포스터.



  <레디 플레이어 원>은 이스터에그(easter egg)로 가득한 영화다. 이스터에그는 부활절 토끼가 부활절 전날, 아이들이 있는 집 안에 색을 칠한 사탕과 달걀이 담긴 바구니를 숨겨놓는다는 부활절 풍습에서 유래했다. 영화, 게임 등의 콘텐츠 제작자는 토끼처럼 이스터에그를 숨겨놓고 이용자들이 찾게끔 한다. 메인 스토리에 큰 영향을 주지 않고 게임 결말이 달라지거나 하지 않는 선에서 순수한 '재미'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영화 속 이스터에그는 이야기를 이끄는 힘 자체다. 멀지 않은 미래, 사람들은 암울한 현실 대신 '오아시스'라는 게임 세계에 빠져든다. 그곳에선 상상하는 모든 것들이 현실이 된다. 어느 날 오아시스의 개발자 할리데이(마크 라이런스)가 숨을 거두고, 미리 프로그래밍된 그의 유언이 전 세계에 발표된다.

"게임 속에 숨겨둔 3개의 열쇠를 찾은 자, 오아시스를 갖게 되리라."


  게임 속 이스터에그는 문제의 답으로 향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오아시스를 소유한다는 건 곧 막대한 부와 세계 전체에 대한 운영권을 손에 쥐는 것이다. 모두가 열쇠 찾기에 혈안이 되고, 우리의 주인공 웨이드 와츠(타이 쉐리던) 역시 그에 동참한다.


  웨이드는 할리데이의 '진성 덕후'다. 매일 할리데이에 관한 영상기록을 살펴보고, 그의 성장과정, 취향, 성격, 대인관계 등 모든 생애를 꿰고 있다. 웨이드는 누구보다 할리데이에 대해 잘 알고 있기에 수월하게 문제를 풀어나간다. 이 과정이 너무도 단순하다. 웨이드가 찾아낸 할리데이의 영상자료에는 노골적으로 힌트가 드러나고, 웨이드는 (관객이 모르는 사이 혼자) 갈고닦은 '덕력' 덕분에 어렵지 않게 열쇠를 쟁취한다.


뭐야 나만 쓰레기야? 나만 할리데이 너무 뻔해? ⓒ<레디 플레이어 원> 포스터.


   "맞아! 할리데이는 ~를 좋아했어!", "사실 할리데이는 ~하는 마음이었어!" 같은 식의 대사가 나온 순간 모든 답이 나온다. 하지만 영화는 웨이드의 시점을 따르기 때문에 관객은 할리데이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상태. 아무리 웨이드가 줄줄이 읇어도 그게 정답인지 아닌지, 얼마나 독보적인 지식인지 알 길이 없다. 이스터에그를 찾는 순간의 짜릿함을 누리지 못하니 보이는 건, 뻔한 소년의 성장사, 허술한 개연성, 평면적인 캐릭터 등이다.    


  스토리 외에 존재하는 이스터에그도 마찬가지다. 영화에 스치듯 등장하는 음악, 영화, 게임, 애니메이션, 캐릭터 등등은 80~00년대 미국에서 인기를 얻었던 대중문화가 대부분(최근 콘텐츠 일부 포함)을 차지하고 있다. 아는 사람은 쉽게 찾을 수 있지만 모른다면 소외되기 십상이다. '몰라도 지나갈 수 있는 작은 재미'가 100가지쯤 된다고 생각하면 더 이상 작지 않다. 영화의 모든 요소에 이스터에그가 있다는 말은 이스터에그를 뺐을 때 남는 게 없다는 말과 같다.


  백 투 더 퓨처, 아이언 자이언트, 샤이닝, 터미네이터, 토요일 밤의 열기, 스타워즈, 주토피아, 사탄의 인형, 왓치맨, 라스트 액션 히어로, 반지의 제왕, 인디아나 존스, 킹콩, 고질라, 매드 맥스, 로보캅, 고스트 버스터즈, 몬스터 주식회사, 파이어 플라이, 스타트렉, 카우보이 비밥, 엑스칼리버, 비틀 주스, 신밧드, 카우보이 벤자이의 모험, 트랜스포머, 13일의 금요일, 나이트메어, 닥터 후, A특공대, 쥬라기 공원, 에일리언, 트론, 캐리비안의 해적, 우주전쟁, 아바타, 그렘린, 퍼시픽 림, 매트릭스, 해리포터, 헝거게임, 건담, 스펀지송, 심슨 가족, 사무라이 잭, 슈퍼맨, 배트맨, 조커, 할리퀸, 닌자 거북이, 헬보이, 데스노트, 파워퍼프걸, 드래곤볼 Z, 아키라, 디지몬 어드벤처, 토이 스토리, 포켓몬스터, 스타크래프트, 오버 워치, 헤일로, 메탈기어, 툼레이더, 스페이스 인베이더, 소닉, 듀크 뉴켐, 기어스 오브 워, 스트리트 파이터, 하프라이프, 마인크래프트, 앵그리버드, 갓 오브 워, 크리스틴, 워킹데드, 프레데터, 언차티드, 슈퍼 마리오, 젤다의 전설, 바이오쇼크, 바이오하자드, 다크 소울, 소울 칼리버, 아랑전설, 데드 라이징, 이레이저, 스콧 필그림, 리그 오브 레전드, 마이클 잭슨, 듀란듀란…. 이스터에그 138개를 정리한 영상(클릭)도 있다.


  <레디 플레이어 원>은 각 콘텐츠에 대한 호감과 재미에 이 모든 것을 한 영화에 모았다는 의의가 더해져 형성된다. 대중문화에 애정과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느 한구석쯤은 반드시 좋아할 만한 '환상특급'인 셈이다. 그러나 이 환상특급이 무엇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는 각기 다른 콘텐츠의 가치와 무관한, 별개의 문제다.




- 대중문화에 없는 대중


게임 캐릭터를 삭제하듯 간단히 제거되는 대중. ⓒ<레디 플레이어 원> 스틸.

 

  영화의 결말부터 차근차근 되짚어보자. 현실에 적응하지 못했던 소년은 다락방에 콕 박혀 게임에 몰두했다. 소년은 마침내 환상을 실현시키는 가상 세계를 만드는 개발자가 되었다. 하지만 제대로 마음을 전하지 못해 좋아하는 여자를 놓쳐버렸고, 동업자에게서 경영권을 박탈하며 온전히 혼자가 되었다. 그는 자신이 창조한 세상에다 누구도 곁에 두지 않은 것을 후회하는 자신의 캐릭터를 프로그래밍해놓고 누군가 발견해주길 바라며 홀로 쓸쓸히 죽음을 맞는다.


  "Realtiy is real." 할리데이(의 캐릭터)는 모든 문제를 푼 웨이드에게 어린 날 자신을 소개하며 게임에 빠진 계기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해서'라고 밝힌다. 할리데이가 만든 게임은 세상을, 사람들의 삶을 돌이킬 수 없이 바꿔놓았지만 정작 그는 '게임은 게임처럼 즐겨야 한다'며 안타까워한다.


  천재 개발자는 대인관계에 서툰 외톨이고 연애도 제대로 못하는 숙맥이다. 소름 끼치게도 첫사랑을 똑 닮은 캐릭터를 만들어 게임 속 감옥(플레이어는 그녀를 구해줘야 '열쇠'를 얻는다)에 가둬버리기까지 한다. 게임에 빠진 사람들을 향한 부정적 고정관념, 스테레오타입의 반영이다. 공익광고의 그것과 아주 유사하지 않은가.


  웨이드 역시 처음엔 할리데이와 같았다. 지긋지긋한 빈민촌 컨테이너 박스와 이모의 폭력적인 남자친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게임 속 출세를 꿈꾼다. 그러나 게임 산업계를 장악한 악덕 기업 IOI 의 만행을 목격하고, 사만다(올리비아 쿡)의 아버지가 게임 빚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는 걸 알게 된 웨이드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 게임에 참여한다.


주요 인물은 거리에 '좀비처럼' 떠도는 대중과 달리 공간을 가졌다.  ⓒ<레디 플레이어 원> 스틸.


  반면교사를 통해 '바람직한' 덕후가 되어 세상을 구한다. 영화는 특정 방향을 명확하게 제시한다. 달리 말해 그 외 다른 모습은 바람직하지 않은 소비자가 된다. 영화 속 대중은 일확천금을 위해 빚을 내가며 게임 장비를 구입하고, 끝내 게임회사에 귀속되어 노동을 착취당한다. 또한 VR기기를 쓴 채 거리를 배회하며 웨이드가 선동하기 전까지는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각자 게임을 즐긴다.


  웨이드는 오아시스의 경영을 맡자마자 특정 요일에는 게임 접속을 차단하는 정책을 도입한다. 말 그대로의 셧다운제다. 게임을 '즐기지 못하고' 현실을 저버리는 대중을 '통제'함으로써 무분별한 중독과 몰입을 막는 것이다. 그들이 현실에서 도망친 이유나 현실에 존재하는 실질적인 문제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저 수동적이고 비주체적인 대중이 잘못했었고 앞으로는 그러지 않으면 만사형통이라는 결말이다.


  결국 현실의 비극은 '어리석은' 대중의 문제로 귀결된다. 대기업이 횡포를 부려도 시장의 명목적 자유는 규제하지 않는다. IOI는 게임 장비를 팔아 잇속을 채우며 채무자들을 노예처럼 부리지만 오아시스는 기업 계정 접속을 차단하고 외부 유료 장비 적용을 제한하는 등의 방어책을 마련하지 않는다. 다만 세상을 구할 히어로를 기다릴 뿐이다. 어떻게 보면 지극히 미국적이다.


  <레디 플레이어 원>은 대중문화를 찬미하는 동시에 그를 둘러싼 자본과 체계를 옹호하며 대중을 평가절하한다. 또한 모두가 구조엔 문제가 없고 개인만 잘하면 된다고 증명해줄 영웅-플레이어 원-으로서 존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더 포스트>에서 자본과 언론의 결탁을 지적하기보단 당연한 구조 내에서 옳은 선택을 하는 개인에 집중하듯). 문화가 발전하기 위해선 자본이 필요하지만 사회적 안전망이 또한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며 셧다운제는 싫어해도 최근 공정거래위원회의 대형 게임업체 제재 행보를 지지하는 필자는, 아무래도 플레이어 원이 될 수 없을 것 같다.

 


플레이어 원을 위해 평가절하된 대중. ⓒ<레디 플레이어 원> 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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