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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서민서패밀리 Jul 02. 2020

가장 맛있는 음식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은 무엇일까.



미슐랭 가이드에 소개된 근사한 레스토랑 코스요리, 아님 마블링이 예쁘게 입혀져 있는 한우를 숯불에 살짝  올린 구이요리, 그것도 아님 서울 구석진 노포에서 내놓는 50년 전통의 설렁탕?



백종원, 이연복 같은 유명한 셰프가 TV에 나와서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다,라고 선언을 해주면 좋겠지만 그것은 매우 드문 일이기에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찾는 것은 무척이나 지난하다.



물론 나 역시 "절대적으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한한 종류의 음식만큼 사람들 각자가 추구하는 입맛이 절대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논의의 방향을 "절대적으로"에서 "나에게 있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 무엇인가를 찾는 것으로 바꾸는 것이 좀 더 건설적일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질문에 대한 각자의 대답을 하나씩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질문하면, 나에게 있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은 무엇일까?






#1. 라따뚜이




혹시 이 장면을 기억하는가. 영화 <라따뚜이>에 나오는 유명하고 콧대 높은 요리 평론가 Anton Ego 씨가 생쥐 Remy가 내놓은 요리에 놀라움을 느끼는 장면이다. (테이블 위에 놓은 커다란 와인병과 아주 작은 라따뚜이가 매우 대조적이다)



이름마저도 Ego(자부심, 자아)인 그를 일깨운 최고의 요리는 무엇이었을까. 프랑스의 자랑인 푸아그라, 아님 코코뱅?



하지만 그것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프랑스 가정식인 라따뚜이였다. 평범한 어린 시절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자주 만들어줬던, 그래서 가장 익숙한 맛일 수밖에 없는 채소 스튜 말이다. 그 별 볼일 없는 라따뚜이에서 Ego는 어렸을 적 기억과 함께 어머니의 따뜻함을 느꼈을 것이고 그 화학 작용이 그의 뇌에 맛있음을 느끼도록 이끌었을 것이다.



어쩌면 최고의 맛은 기억(또는 추억)과 맞닿아 있을 것이다.






#2. 어느 아침



주말 출근이 필요했던 일요일 아침, 태어난 지 보름밖에 안 된 둘째 아기를 돌봐주시기 위해 고향에서 올라오신 어머니가 나에게 아침 먹고 가라며 작은 반상을 차려주셨다. 특별할 것 없는 찬과 국이었다. 평소 아침 먹는 일이 잘 없던 나이기에 어머니도 반신반의하며 상을 차렸을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에 그냥 나올 수 없어, 큰 의미 없이 한 술 입에 떠 넣었는데 뜻밖에도 혀를 자극하는 참 좋은 맛이 입 안 전체에서 느껴졌다. 고춧가루를 조금 풀어넣은 평범한 북엇국이었는데 더하고 덜할 것도 없이 내 입맛에 딱 맞았다. 어렸을 적 많이 먹었던 매우 익숙한 그 맛이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아침 한 그릇을 뚝딱하고 집을 나서는데 왠지 모를 포만감이 가슴과 배에서 동시에 느껴졌다. 어쩌면 음식에 고마움이 더해졌을 때 최고의 맛을 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 냉모밀



공무원 시험 준비하는 기간 동안 가장 많이 먹었던 음식이 뭐냐고 물어본다면, 아쉽게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답변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2년 좀 넘는 기간 동안 신림동 여기저기 위치한 평범한 고시식당 중 하나에서 월정기권을 끊고 의미 없이 배를 채웠기 때문이다. 음식이 코로 넘어가는지 모르겠다는 말은 사실이다, 내가 겪어봐서 안다.



다만 그 기간 동안 가장 맛있게 먹었던 음식이 뭐냐고 물어본다면, 다행히 답이 있다. 바로 원룸 근처 식당에서 팔던 냉모밀이 그것이다. 나는 한 달에 두 번씩 고시식당이 쉬는 날마다 꼭 그 식당에 찾아가서 냉모밀을 시켜먹었다. 징크스 이런 건 아니고 그냥 맛있어서 습관처럼 갔다.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가 테이블에 앉아 냉모밀을 주문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아저씨가 언제나처럼 아래위 두 판의 모밀국수와 그 옆에 조그만 국그릇에 시큼 달짝한 소스를 담아 노란 단무지와 함께 서빙해주셨다. 나는 곧바로 적정량의 파와 와사비를 소스에 넣고 젓가락을 몇 번 휘저은 다음 면을 조금씩 소스 그릇에 넣어 먹었다. 소스에 적셔진 면이 혀를 지나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순간, 약간의 새콤함과 함께 달콤함이 입안에 가득 퍼지는 그 순간이 공부로 힘든 시기를 극복하는 힘이 돼주었다.



물론 시험 합격하고 공무원이 되고 나서는 어디에서도 그 맛을 느낄 수 없다. 최고의 맛은 적정한 상황에서 나오는 것 같다.






정리하면, 나에게 있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은, 좋은 추억이 담겨 있는 음식, 고마움이 서려 있는 음식, 상황에 맞는 음식일 것이다.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생각나는 음식이 몇 가지 더 있었다.






#4. 오뚜기 스파게티



논산훈련소에서 자대 배치받은 후 며칠 지나지 않아 모든 것이 낯선 이등병 때 일이다. 어느 저녁 한 병장이 배고프지 않냐며 오뚜기 스파게티 라면 하나를 뽀글이로 만들어서 먹으라고 전해주었다. 하루종일 훈련과 잡일에 몸과 마음이 지쳐있는 상황에서 그것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물과 같았다.



1000원도 안 되는 인스턴트 라면, 그것도 뽀글이 방식으로 끓인 것이 무슨 맛이 있냐고 하겠지만 배고픈 이등병이 본인 짬밥으로 도저히 먹을 수 없는 희소성 높은 라면을 병장이 감사하게도 하사해 주었다면 그것은 맛있을 수밖에 없다. 맛있어야만 한다.



20년 가까이 지난 일이지만 나는 그 순간과 그 맛이 생생히 기억난다. 비 오는 저녁이었고 그 병장의 이름은 김동욱이었다. 본인이 직접 비벼서 나에게 전달해주었고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꾹 참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깨끗이 다 먹었었다.






#5. 시저 샌드위치



배낭여행 떠난 만 20살 어린 대학생이 영국 런던에서 프랑스 파리로 떠나는 아침 9시 영국항공 비행기를 탑승하게 되었다. 2002년 여름의 일이다.



호텔에서 새벽에 일찍 일어나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헐레벌떡 공항까지 뛰어온 터라 매우 배가 고팠지만 가방에는 아무것도 없는 슬픈 상황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승무원이 샌드위치 기내식을 건네주었다. 예상치 못한 아침식사에 땡큐를 연발하며 한 입 베어 물었는데 너무나 맛있었다. 도대체 무슨 샌드위치길래 이렇게 맛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어 포장지를 살펴보니 "Caesar"라고만 쓰여있었다.



이후 여러 샌드위치를 먹어보았지만 그 맛을 다시 느낄 수는 없었다. 써브웨이에도 그런 맛은 없다.






누구나 자기에게 맞는 맛있는 요리 목록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멈춰있는 것이 아니다.


좋은 추억과 감사함과 적절한 상황이 어우러진다면, 그 순간이 바로 내 앞에 놓인 요리가 나의 favorite food list에 등재되는 순간일 것이다.


"Not everyone can become a great artist; but a great artist can come from anywhere."


영화 라따뚜이의 요리 평론가 Anton Ego의 말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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