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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서민서패밀리 Nov 15. 2020

16. 미국 도서관 in 시카고


오늘 집 근처 공공도서관을 다녀왔다. Wheaton Public Library라는 곳인데, 3층짜리 건물에 주차장도 넓었다. 동네에서 제일 좋은 건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와 준서는 이미 한 달 전에 회원 가입을 해서 책을 꽤 빌려봤었다. 나는 학교 도서관도 있고 해서 차일피일 미루던 차에,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회원 가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따라나섰다.

공공도서관 안에는 주말임에도 사람이 많았다. 도서를 반납하는 사람과 빌려가는 사람들로 실내는 붐비고 있었다. 그래도 마스크를 쓰고 서로서로 거리를 두고 있는 걸 보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원 가입이 필요한 나는 Registration 이라고 적힌 곳으로 갔다. 내 앞에 한 명이 가입을 진행 중이었다. 나는 온몸의 기를 청각에 모아 그 사람의 진행 프로세스를 파악했다. 과정만 파악하면 영어에 대한 부담 없이 가입을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차례가 되었다. 난 묻기도 전에 대답을 생각해내었고, 네이티브처럼 편하게 가입을 진행했다. 그야말로 답정너인 상황이었다. 잔머리가 이럴 때는 많은 도움이 된다.

도서관 회원가입은 집 렌트 계약서만 있으면 가능하다. 주소 확인이 가장 중요한 듯했다. 아내가 준서와 가입하러 갔을 때에도 여권을 가져갔지만 보여주지는 않았다고 했는데 내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손에 빠알간 관용여권을 들고 갔지만 무안하게 계속 그 자리에 있었다. 개인신분 확인은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뭐 내 할 일은 아니니.

암튼 가입절차가 다 끝나갈 무렵,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사실 아내가 먼저 가입해 있는데 나도 책 빌리고 싶어서 왔다" 라는 말을 슬쩍 꺼냈다. 별생각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내 말이 끝나자마자 그 직원분이 혹시 아내가 아이와 함께 오지 않았냐면서 누군지 알겠다고 했다. 내가 응? 한 달도 넘은 일인데? 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니 웃으며 그 여성분도 여권을 가져왔다고 했다. 순간 내 손에 들린 빠알간 여권이 무안한 듯 더 빨개지는 것 같았다.

사실 여권도 여권이지만, 동네에 아시아인이 없다는 점이 더 크게 작용했을 것 같다. 오늘도 도서관 내에 우리 가족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백인이었으니 직원이 아내와 아이를 기억 안할래야 안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직원분은 나에게 회원카드를 가족과 연동시켜 줄 테니 다시 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아내 퍼스트 네임을 물었다. 내가 "Miah 미아"라고 하자 그분이 바로 "아, 미아 송" 했다. 미국은 아내가 남편 성을 따라가는 문화여서 당연히 남편 성인 Song과 같을 것이라 생각한 듯 보였다. 설명이 필요했다. 설명을 안 해주면 우리를 사실혼 관계 혹은 나를 남자 친구로 오인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준서, 민서를 아빠 없는 아이로 만들 수는 없었다. 하지만 쉽지 않은 설명이었다. 심호흡을 한 후에,

마늘과 쑥을 열심히 먹은 곰이 환웅과 결혼해 단군을 낳았고, 그 단군이 고조선을 세웠으며 그 후로 삼국시대, 고려, 조선을 거쳐 지금의 대한민국이 되었는데, 유구한 역사 속에서 우리는 서양의 부부동성 제도와 달리 부부별성 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아시아 국가들은 대부분 부부별성.....

이라고 머리는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입은 어버버 하고 있었다. 땀이 흘렀다. 그러자 직원분이 "아, 맞다. 저번에 너 아내가 설명했었어. 너희 다른 성 쓴다매." 정말 다행이었다. 힘들게 설명했을 아내가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사실 곰과 환웅 결혼에서부터 안 믿어줄 것 같았다.

암튼 무사히 회원카드 가족 연동까지 마치고 당당히 책을 빌릴 수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빌린 책은 "USA's National Parks"였다. 2년간 미국 내 국립공원을 다 가보는 것이 내 목표이기 때문이다. 부푼 꿈에 빠져 흐뭇하게 책을 바라보고 있는데, 저쪽에서 큰 보따리에 빌릴 책을 가득 담은 아시아인 엄마와 아들이 다가왔다. 송미아 씨와 그 아들 준쎄오였다. 보따리에 책이 서른 권도 넘어 보였는데, 여기는 대출 권수에 제한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 모습은 마치 아시아인 가족이 미국 공공도서관에서 책을 도굴해가는 느낌이었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도굴단에 합류하여 한참을 셀프 기계 앞에 서서 책 바코드를 찍었다. 그리고 조용히 보따리를 매고 나왔다.

공공도서관 너무 훌륭하고 좋은 곳이지만, 다음에는 혼자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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