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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서민서패밀리 Dec 17. 2020

22. 퍼즐 in 시카고


겨울학기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3주 남짓. 그동안 미뤄뒀던 일들을 해야 했다.


처음으로 한 일은 깍두기 담그는 일이었다. 얼떨결에 산 무를(19. 한인마트 in 시카고 참고), 이제는 해결해야 할 때가 되었다. 레시피는 경제학 박사과정 재학 중인 아는 동생이 공유해 준 것을 대놓고 따라 했다. 간단하고 편해서 역시 배운 사람의 추천 레시피는 다르다는 걸 또 한 번 느꼈다.


깍두기를 담그고, 무 피클까지 만들고 나니 세상 무서울 것이 없었다. 그래서 내친김에 한인마트에 가서 무 한 박스를 더 사 왔다... 응?! 이 무슨 신박한 전개인가. 무 한 박스 받고 한 박스 더 라니.. 타짜의 고니도 놀랄만한 화끈한 레이스였다.


새로 사 온 무 한 박스로 깍두기를 좀 더 담그고 여기에 더해 섞박지까지 만들었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밤새는 줄 모른다고 아내와 나는 세상 모든 “무 요리”를 도장깨기 할 마음으로 하나씩 해나갔다. 덕분에 우리의 식탁은 한국인의 무밥상이 되었지만, 그래도 내년 봄까지 밑반찬 걱정은 없을 것 같다.


무와의 한 판 승부를 끝내고 나니 공허함이 찾아왔다. 시카고의 겨울 해는 유난히 짧아서 4시만 되면 어둑어둑 해졌다. 실외는 항시 영하 대기 중이었다. 따라서 실내에서 즐길 수 있는 여가활동이 필요했다. 아내와 상의 끝에 보드게임을 사기로 했다. 잇츠게임타임!


보드게임을 사기 위해 일요일 오후 집 근처 Target 마트에 갔다. 보드게임 섹션에는 이미 꽤 많은 미국인들이 모여 있었다. 역시 동서고금 막론하고 사람 생각은 다 거기서 거긴 것 같다. 그들의 표정에서 나와 동일한 일상의 무료함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Ticket to ride"와 "Don't break the ice"라는 게임을 골랐다. 그리고 계산대로 발걸음을 옮기려 하는데 갑자기 퍼즐 섹션이 눈에 들어왔다. 왠지 퍼즐이 우리 가족의 긴 저녁시간을 켜켜이 채워줄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어느새 나는 퍼즐 섹션 앞에 서 있었다. 준서는 아동 퍼즐의 마스터였지만, 난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퍼즐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쉬운지 어려운지 아예 감이 없었다.


찬찬히 퍼즐을 살펴보던 나는 2000피스 칸의 "National Park" 퍼즐에 시선이 고정됨을 느꼈다. 가로 98cm, 세로 67cm의 대형 퍼즐이었다. 퍼즐 난이도에 대한 감이 없던 나는 저정도면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또한 퍼즐을 통해 미국 국립공원 공부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살짝 떨리기까지 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그 자리에서 구입을 결심했다.


집에 돌아와서 나는 자랑스럽게 2000피스 퍼즐을 아내에게 공개하였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 500피스 퍼즐을 완성한 경험이 있는 아내는 말 없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황망히 자리를 피하였다. 기뻐서 그런가? 하지만 그 때까지도 난 미처 몰랐었다, 이것이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를.


2000피스 퍼즐을 개봉한 일요일 저녁, 나는 기쁘게 퍼즐을 찾기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 지 몰라 당황스러웠지만 처음이라 그렇겠지 하고 일단은 넘어갔다. 그리고나서 한 두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나는 제대로된 시작을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겨우 한 조각 두 조각 맞추면서부터 뭔가 일이 잘못 되어가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어, 이게 아닌데..


그리고 사흘이 지난 지금, 여전히 나는 퍼즐 앞에 앉아 짝을 맞추고 있다.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을 들으며, 그런 만남이 어디서 잘못됐는지 난 알 수 없는 예감에 조금씩 빠져들고 있을때쯤.. 하지만 이미 손은 다음 퍼즐조각을 찾아 헤매고 있다. 내 인생에서 포기 하나 더 하는 건 흠이 아니다 라고 수없이 나를 달래보지만 어느새 다시 돌아와 퍼즐 조각을 찾고 있다.


아내는 기말시험 준비할 때도 안 골던 코를 퍼즐을 시작한 후로는 매일같이 곤다며, 이게 코 골아가면서 할 일이냐고 구박하지만, 나는 그런 구박을 듣는 순간에도 머리 속으로는 옐로우스톤 조각은 어디로 갔을까를 고민하고 있었다. 매일 같이 국립공원 퍼즐완성본을 보고 있다보니, 이제 미국 국립공원은 직접 안가봐도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 이거 하다가 겨울 순삭할 듯 하다. 브런치고 뭐고 다시 퍼즐 맞추러 가야겠다.


2000피스 퍼즐 한 줄 평 : 500피스 이상 퍼즐은 법으로 금지해야 한다.



ps.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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