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학기 기말시험이 끝나고 일주일이 지났다. 겨울학기 사이에 공식적인 브레이크는 일주일이지만, 크리스마스에 새해 연휴까지 해서 근 한 달 휴가를 받았다. 시험공부는 힘들었지만, 그래도 고생하고 노니 두 배로 즐겁다. 일 많이 하고 먹는 밥이 더 맛있는 것처럼.
가을학기가 석사 첫 학기였고 미국에서 듣는 첫 수업이라서 긴장을 많이 했었는데 그럭저럭 괜찮았다. 수업시간에 못 알아들었으면 교재로 복습하면 되고 그래도 모르면 시험에서 틀리면 된다는 생각으로 했더니 마음도 편했다. 오기 전에는 수업 어떻게 따라갈까 걱정했는데 막상 오면 다 알아서 되는 것 같다. 걱정 노노.
가을학기 수업 중 복기할 만한 내용은 "개인의 자유에 대한 강조" 였다. 정책학 전공이어서 정부 중심으로 가르치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물론 시카고학파 자체가 시장의 힘을 믿고 규제를 최소화하자는 주장을 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기도 하지만, 정부 중심 시각에서 벗어나 시민, 시장 등 다양한 다이내믹스를 살펴볼 수 있어서 좋았다.
수업의 공통된 질문(테마)에는 항상 "개인의 효용(utility)"이 자리 잡고 있었다. 경제든, 통계든, 정책이든 모든 분석 단위의 기본은 개인이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정책분석(Analytical Policy) 과목의 기말고사 시험문제였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증가로 뉴욕 주지사 앤드류 쿠오모는 종교모임에 대한 제한을 명령하였다. 하지만 미 연방 대법원은 11월 25일 이러한 제한명령에 대해 위법으로 판결하였다. 법관 다수의 의견은 쿠오모의 제한명령이 미국 연방헌법 제1조가 보장하고 있는 종교 활동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것이다.
질문. 쿠오모의 제한을 옹호하는 주장과 연방대법원 판결을 옹호하는 주장의 논거를 말하시오."
결론은 쿠오모의 제한명령은 다수 개인의 효용을 (부정적 외부효과 externalities 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고, 연방대법원 역시 개인의 종교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의 이슈로 인해 견해가 충돌되는 듯 하지만 사실은 다양한 시각으로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학업 외에 실제 생활에서도 미국은 개인의 자유를 무척이나 강조한다.
이걸 처음 느낀 것은 직접 운전을 하면서다. (교외 운전 기준이다) 우선 비보호 좌회전이 많다. 사거리에 좌회전 신호가 있는 곳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신호가 짧거나 아예 없다. 따라서 좌회전을 위해서는 좌회전 깜빡이를 넣고 보고 있다가 반대쪽 차선에서 차가 오지 않을 때 얼른 꺾어 가야 한다.
또한 양쪽 차선 가운데에 양쪽 모두 사용할 수 있는 대기라인 한 줄을 만들어 놓았는데 이건 신호가 없을 때에도 언제든 좌회전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멀리까지 가서 유턴하는 수고를 덜 수 있어 매우 편리하다.
미국 도로교통의 경우 정부가 정한 룰은 최소한에 그치고 나머지 (자유의) 영역에서는 본인들 책임하에 안전운행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러한 비보호 중심 도로 규정은 운전자와 관리자 모두의 효용을 높일 수 있다. 운전자는 인위적 신호가 적어서 끊김 없이 원활한 교통흐름을 누릴 수 있고 유턴 등 돌아가는 운행도 할 필요가 없어진다. 관리자인 주정부 입장에서는 신호등 설치비용, 운영비용 등을 절약할 수 있다. 개인의 자유 보장으로 인해 사회의 주요 행위자들의 효용이 증가하는 것, 즉 파레토 최적 상태가 되는 것이다.
비보호가 많아서 운전이 꽤 위험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다들 천천히 운전하기 때문이다. 사고처리가 힘들어서 인지, 보험이 비싸서 인지, 아니면 여유로운 성격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다들 양보운전을 하기에 차량사고를 목격하기가 쉽지 않다.
개인 자유의 강조는 교통만이 아니다.
이전에 설명한 바 있듯이 공공도서관은 대출 권수에 제한이 없다. 다만 연체될 경우 벌금 fine을 내야 한다. "응 마음껏 다 빌려가~ 대신 늦으면 벌금 알지?" 뭐 이런 식이다. 책을 빌리는 사람은 필요한 책을 원하는 수만큼 빌릴 수 있으니 좋고, 도서관은 시민들의 행복감 상승에 기여할 수 있어서 좋다. 벌금 부과 제도가 있어 연체도 많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 역시 개인 자유 보장으로 인한 효용 증가일 것이다.
하나 더 하면 레저활동도 그렇다. 지난달 플로리다 에버글레이즈 국립공원에 갔을 때 일이다. 카누를 타고 악어를 직접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어 준서와 타기로 했다. 만 5세가 가능하냐고 물으니 된다고 했다. 악어가 많이 사는 곳에 아빠와 아들이 배 하나 타고 노 저어 가는 건데 그래도 괜찮냐고 물으니 다시 괜찮다고 했다. 하지만 그래 놓고 타기 전에는 신체포기 각서로 보이는 여러 문서에 사인은 하라고 했다. 폭넓은 자유 보장으로 인해 우리 부자는 실제 강에서 생활하는 여러 마리의 악어들을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게 되어 행복했고 업체는 돈을 벌어 행복했을 것이다. 진심 악어 잡으러 갑시다 늪을 지나갑시다의 실사판이었다.
놀이동산도 마찬가지다. 키가 110센티 이상이면 거의 모든 놀이기구를 다 탈 수 있다. 이걸 얘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들은 괜찮다고 한다. 물론 당연히 책임은 부모와 아이가 지는 것이다. 부모 보호 하에 안전하게 이용을 할 경우 이용자인 개인도 운영자인 놀이동산도 모두 효용이 높아지게 되어 윈윈이 될 것이다. 준서는 덕분에 놀이기구 많이 타고 좋았다.
물론 사고가 일어나 위험할 수도 있다. 비보호 도로체계의 경우 직진 진행 차량 입장에서는 때때로 불쑥 튀어나오는 차량에 놀랄 수 있다. 가끔은 "와, 이걸 들어오네"하는 순간이 있어서 항상 전방 주시하고 방어운전을 해야 하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이에 적응하고 양보 운전한다면 이보다 더 효율적인 도로교통체계는 없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올 때 코로나 규제(라고 할만한 것도 별로 없었다)가 너무 헐거워서 불안했었다. 실내 마스크 착용 의무 외에는 아무것도 제한하지 않아서 걱정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여 부여된 자유 덕에 우리는 자가격리 없이 바로 생활할 수 있었고, 준서는 9월 신학기부터 바로 학교에 다닐 수 있었으며 시카고 내 박물관, 아쿠아리움도 여러 차례 갈 수 있었다. 또한 로드트립을 통해 여러 국립공원과 디즈니월드를 다녀올 수 있었다. 마스크 꼬박꼬박 잘 쓰고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 그리고 못했을 경우 스스로 책임을 지는 것. 어쩌면 이러한 큰 틀 안에서 미국사회가 돌아가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밖에서 보기에는 미국 사회가 엄청 혼란스럽고 코로나 무법천지처럼 보이겠지만 (물론 통계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사실 안에 사는 사람들은 각자의 책임 하에 질서 있게 생활하고 있다. 물론 사회가 온통 비보호 무한 자기 책임이라 부담스러울 때도 있지만..
근데.. 점점 좋아진다 이 자유가.
ps. 악어 잡으러 갑시다 헤엄쳐서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