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New Year 을 맞아 따뜻한 남쪽 플로리다로 여행을 다녀왔다. 떠나는 날 아침 시카고 기온이 영하 6도였는데 플로리다에 도착했을 때는 영상 24도였다. 같은 나라 안에서 기온이 30도나 차이가 나는 걸 보면 미국 땅덩어리가 넓긴 넓은 것 같다.
시카고에서 플로리다로 내려가는 동안 세 가지 계절을 마주할 수 있었다. 시카고는 겨울이었지만 테네시주는 가을이었고 플로리다는 여름이었다. 테네시주로 내려가는 65번 고속도로 옆은 가지가 앙상한 나무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플로리다로 가는 75번 고속도로 옆 나무들은 푸른 잎을 제법 유지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의상도 점퍼에서 긴팔로, 그리고 반팔 반바지로 점점 가벼워지고 있었다. 우리 역시 장롱에 넣어두었던 반팔 반바지를 오랜만에 꺼내 신나게 입고 돌아다녔다. 시카고의 강추위를 피해 내려갔기 때문에 따뜻한 날씨가 주는 선물이 그저 반갑기만 했다.
플로리다까지 가는 길은 차로 17시간 이상 걸릴 만큼 고되고 힘들었다. 하지만 그 고난 뒤에 오는 즐거움이 더 클 것임을 알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내려갈 수 있었다. 우리는 일주일 동안 자연과 함께, 놀이동산과 함께 행복한 추억을 많이 남길 수 있었다.
플로리다에서의 Hot 한 일주일을 보내고 우리는 다시 북으로 북으로 올라왔다. 집에 돌아온 우리를 처음으로 반겨준 것은 소복히 쌓여있는 눈이었다. 며칠 전 내린 눈으로 이미 동네는 White Wonderland 로 변해있었다. 겨울왕국 왕팬인 준서는 하얀 눈으로 가득 찬 집 앞을 정신없이 뛰어다녔고 아내는 그런 모습을 연신 카메라에 담았다.
내가 집 근처 산책로를 눈삽으로 치우는 사이 준서는 올라프 닮은 눈사람을 하나 만들었다. 냉장고의 당근을 잘라다가 코를 만들고 나뭇가지를 주워다가 양팔도 만들었다. 그리고는 한동안 올라프 주위 눈 밭을 혼자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그 다음 날 낮에는 준서와 둘이서 동네 공원에 갔다. 공원 눈썰매장에서 놀기 위해서였다. 그곳은 언덕에 난간도 설치되어 있고 어느 정도 시설은 갖추고 있었지만 딱히 따로 관리 통제하는 사람은 없는 곳이었다. 미국 특유의 자유방임주의가 온전히 자리 잡고 있었다. 잘못되면 니 책임, 이라고 간판에 크게 쓰여져 있었다.
준서와 나는 마트에서 산 10달러짜리 눈썰매를 가지고 정상까지 뚜벅뚜벅 걸어 올라갔다. 자리를 잡고 앉으니 생각보다 경사가 급했다. 소싯적에 나름 보드 좀 타본 나였지만 컨트롤도 안 되는 플라스틱 눈썰매에 몸을 맡겨야 했기에 조금은 불안했다. 거기에 더해 미국 아이들은 썰매를 가만히 앉아서 타는 게 아니라 서서 타고, 뒤로 타고, 기차처럼 서로 연결해서 타고, 아주 대환장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망설이고 있던 찰나에, 아빠 어서 내려가자요, 준서가 보챘다. 아들 앞에서 모양 빠지게 못 내려간다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미국 아이들의 눈썰매 곡예가 잠잠해지는 틈을 타서 눈썰매를 출발시켰다. 플라스틱 눈썰매는 재빠르게 하강했고 준서와 나는 꽤 먼 거리를 질주한 후 안착할 수 있었다. 도착과 동시에 준서는 한 번 더 를 외쳤다. 그날 하루 동안 눈썰매장 정상까지 썰매를 끌고 몇 번을 오르락내리락했는지 모르겠다.
눈썰매로 신나게 주말을 보낸 준서는 오늘 아침 결연히 스키바지를 입고 학교에 갔다. 친구들과 눈밭에서 놀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항상 영하 언저리를 유지하는 시카고의 겨울 날씨 덕분에 동네와 학교는 여전히 눈 세상이었다.
방과 후 집에 돌아온 준서에게 친구들과 어떻게 놀았느냐고 물었더니 준서는 친구들과 같이 눈을 먹었다고 했다. 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그래서 재차 물었다.
눈을?
응, 친구들하고 같이 눈 먹었어.
데리러 갔던 아내에게 물으니 여기 아이들은 진짜 눈을 먹으면서 논다고 했다. 국민소득 4만 불이 넘는 나라에서 왜 눈을 먹어? 라고 물으니 그게 그냥 노는 방법 같다고 했다. 학교에서 그렇게 논 것이 좋았는지 준서는 집에 와서도 집 앞 나무에 매달린 고드름도 따먹고 후식으로 눈도 먹었다. 앞으로 식비가 좀 덜 들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시카고의 긴 겨울을 어떻게 보내야 하나 막막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강추위가 싫어 플로리다로 도망(?)가기도 했었다. 하지만 눈이 내리고 나니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눈은 세상을 정말 아름답게 변화시켜 주었다.
하얗게 쌓인 눈은 어른들의 마음을 정화시켜 주었고, 아이들은 그런 예쁜 눈과 항상 함께 할 수 있었다. 이것은 예상치 못한 변화였고 큰 선물이었다. 눈과 함께 지내다 보니 지금은 오히려 겨울이 더 천천히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예쁜 겨울왕국을 좀 더 길게 즐길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