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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서민서패밀리 Feb 16. 2021

31. 눈폭풍 in 시카고


일요일 밤, 나는 가족과 함께 인디애나주 인디애나폴리스의 한 호텔에 머무르고 있었다. 연휴를 이용한 근교 외출이었다. 추운 날씨에 시내 구경이 피곤했는지 아내와 아이 둘은 이른 저녁을 먹고 먼저 잠에 들었다.


나는 소파에 누워 인디애나주 로컬 맥주인 Space Station Middle Finger를 한 모금씩 마시며 포틀랜드와 댈러스의 NBA 경기를 보고 있었다. 아메리칸 페일 에일의 쓴 맛 덕분인지 이상하게도 취기가 돌지 않았다.


창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시카고에서 매일 보던 눈이 우리 가족을 따라 여기까지 왔나 싶었다. 물론 거기나 여기나 이맘때 이 정도 눈 내리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스마트폰을 켜 날씨를 보니 영하 12도였다. 그런데 그 아래 낯선 글자가 쓰여있었다.


Winter Storm Warning

겨울 폭풍 경고


이상한 마음에 창가로 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눈이 좀 흩날리기는 했지만 많이 내리지는 않았다.


눈 좀 내리는 거 가지고 엄살은. 누군 왕년에 눈 안 맞아본 줄 알아.


나는 제 자리로 돌아와 페일 에일 한 모금을 더 마셨다. 역시 썼다. 나는 잠을 청했다.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보니 눈이 조금 쌓여있었다. 10센티 정도. 시카고에서 이미 적설량 20센티 이상을 여러 차례 겪었기에 별 거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 정도로 경고를, 훗.


우리는 체크아웃을 하고 예정된 일정인 인디애나폴리스 어린이 박물관 The children's Museum of Indianapolis 으로 향했다. 살짝 눈보라가 치고는 있었으나 크게 개의치 않았다. 11시에 박물관에 도착하여 이곳저곳을 꼼꼼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꽤나 알찬 구성에 종료시간인 5시 전까지 다 보려면 무척 빠듯해 보였다. 여길 또 언제 와볼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그런데, 오후 2시 45분 정도 되었을까, 갑자기 스피커에서 안내방송이 나왔다. Inclement weather 어쩌고 하면서 3시에 박물관 문을 닫는다는 거였다. 순간 아직 볼 것도 많은데 왜, 하면서 짜증이 밀려왔다. 그런데 창 밖을 보니 확실히 눈보라는 강해져 있었다. 날씨가 심상치 않았다.


얼른 짐을 챙겨 주차장으로 나왔다. 원래 내비게이션 상으로 3시간 걸리는 거리가 이미 4시간으로 늘어나 있었다. 그래도 1시간 정도면 다행이었다. 일단 시동을 걸었다.


오전과 달리 박물관 인근 도로에는 눈이 많이 쌓여있었다. 제설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고속도로는 괜찮겠지 했지만 대부분 제설이 안되어있었다. 강력한 눈보라로 인해 도로는 이미 마비상태였다. 어제 올 때 70마일로 쌩쌩 달려온 길을 30마일로 겨우겨우 기어가기 시작했다.


내비게이션 도착시간은 점점 늘어났다. 이제는 5시간이 되었다. 눈보라로 앞은 잘 안보였고, 제설 안된 눈은 바닥에 그대로 깔려있었다. 핸들을 틀면서 액셀을 밟으면 차가 스윽 움직이는 상황이었다. 식은땀이 났다. 나는 풋 브레이크를 잡을 수 없어 엔진 브레이크를 잡으며 감속운전을 했다.


그렇게 4시간가량을 운전하여 일리노이주에 들어오게 되었다. 일리노이주는 그나마 조금 더 제설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그 전보다 눈보라는 더 심해졌다. 편도 4차선 도로를 차들이 멀찌감치 떨어진 채로 3줄로 달려 나가고 있었다. 힘겹게 천천히 거리를 줄여갔다. 결국 중요한 건 집까지의 거리, 즉 마일을 줄여나가는 일이었다.


5시간을 넘기니 낯익은 풍경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5시간 30분이 지났을 때 동네 어귀에 진입하였고, 5시간 40분 만에 드디어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집에 차를 세우고 아내와 두 아이를 먼저 내려주고 나니 그제야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온몸에 기운이 다 빠져나가는 듯했다.


어제 Winter Storm Wanrning 을 보자마자 집에 일찍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면,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 눈이 적게 와있음에 감사하고 출발을 서둘렀다면,

아마도 위험에 처할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어린이 박물관이 3시에 종료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해질 무렵인 5시까지 그곳에 있다가 출발을 했다면,

아마도 더 큰 위험에 처할 수 있을 것이다.


인생에 만약은 없다지만, 위험에 대한 감수성을 높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좀처럼 호들갑 떨지 않는 미국 사람들이 경고까지 날릴 정도면 정말 심각한 거다. 깊이 반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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