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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서민서패밀리 Feb 21. 2021

32. 영어 in 시카고


시카고에 온 지 벌써 6개월이다. 계절은 그새 여름에서 가을, 겨울로 변하였다. 별 일 없이 세월 참 빠르다.

변화는 없는 것 같으면서도 있었다. 가장 놀라운 변화는 준서다. 준서는 정착 초기 영어 때문에 고생이 많았다. (11. 미국학교적응 in 시카고 참고) 이후 학교생활에는 금세 적응하였지만 언어의 장벽은 쉽게 극복되지 않았다.

당시 놀이터에 가면 또래들이 접근해서 항상 말을 걸었다. 이름을 묻는 건지, 사는 장소를 묻는 건지 몰라도 동양 아이에 대한 호기심 속에 끊임없는 접근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준서는 그저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전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항상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도망치듯 그 자리를 피했다. 곁에서 보고 있으면 참 안타까웠다. 친구 하나 없는 낯선 땅에서 접근하는 아이들마저 뿌리쳐야 했던 준서 마음은 오죽했을까.

학교 안에서도 그랬다. 친구들과도 말없이 그저 뛰어놀았다. 방과 후 집에 돌아온 준서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면 행동이나 상황 등을 설명할 뿐 어떤 내용인지 선생님과 친구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전혀 전달하지 못했다. 그 상황이 공감되어서 더 슬펐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흘러갔다. 그리고 바로 어제가 준서 학교 출석 100일째 되는 날이었다. 꽤 긴 시간동안 우리 부부는 준서가 그저 아이들과 잘 지내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영어는 언감생심이었다. 혹시라도 애한테 부담이 될까봐 영어 이야기는 거의 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준서는 영어에 빠르게 적응했다.

처음 시작은 단순했다. 친구들이 학교에서 하는 간단한 리액션을 따라 하는 것이었다. 예스. 노. 와이. 네버. 아임긋. 이때가 한 3개월 정도 되었을 때 같다. 정말 단순한 표현들이었다. 물론 그 정도도 당시에는 엄청 감사했다. 영어를 한다는 것 자체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리고 4개월 정도 지나니 간단한 영어 단어들을 입에서 뱉어내기 시작했다. bald eagle, squirrel, kindergarten, charger, tag, ball 등. 다 학교 생활 속에서 반복적으로 듣는 단어들이었다. 우리 부부가 가르쳐 준 적 없는 단어들이기도 했다. 아마도 단어 체득 과정은 그저 친구들 말하는 것을 귀 기울여 듣고 그대로 흉내 내는 거 였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발음이 굉장히 본토(?)스럽다.

어느 날 학교 다녀와서는, "아빠, 오늘 학교에서 벌드 이그얼 봤어요" 하는데 처음에는 못 알아 들었다. 또 하루는 "엄마, 학교에 차져얼을 놓고 왔어요" 뭐 이런 식이다. 고백하자면 이것 외에도 못 알아듣는 단어들이 무수히 많았다. 그리고 이때부터 흥선대원군의 마음이 점점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5개월이 지나니 짧은 영어 문장도 말하기 시작했고, 6개월 정도 되니 아주 쉬운 영어 책은 혼자 소리 내어 읽는 정도까지 되었다. 그리고 요즘은 매주 있는 학교 단어시험도 어려움 없이 풀고 온다. 이 모든 것이 하루 종일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 친구들과 뛰어노는 간식시간, 그리고 방과 후 친구들과 노는 시간, 재밌게 보는 미국 TV 만화 등이 차곡차곡 모아져 얻게 된 결과로 보인다. 물론 한국인 1도 없는 어마 무시한 학교 환경이 준서를 더더욱 챌린지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스파르타식인가.

하지만 조금 안타까운 점도 있다. 영어에 적응하면서 희한하게도 말이 짧아진 것이다. 물론 미국말에 존대가 없고 아직 한국말이 완벽하지 않아서 그렇기도 하지만, 한국에서 존댓말:반말 비율이 8:2 정도였다면, 여기 와서 영어 하면서는 거의 5:5가 되어가고 있다.

사실 한국에서는 반말을 거의 안 하는데도 할 때마다 꼬박꼬박 존댓말로 고쳐줬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게 좀 애매하다. 이걸 고쳐주다가 혹시 영어가 헷갈리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이다. 괜한 걱정인 걸 알지만 초기에 아이가 무척이나 힘들어했던 걸 생각하면 0.1%의 가능성도 그냥 넘어가기 어렵다. 암튼 그래서 그냥 두고 있다. 아이의 안정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그 옛날 찬호형도 LA 다저스에서 처음 성공하고 막 돌아왔을 때 한국말을 제대로 못해 국민들을 혼란의 도가니로 빠뜨린 적이 있었는데, 준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둘 다 뭐 고의는 아닐테니까.

참고로, 아내도 영어가 많이 늘었다. 원래 영어교육학 석사까지 마친 인재이기는 했지만, 준서 친구 엄마들(미국인)과 절친이 되면서 더더욱 영어가 많이 늘은 것 같다. 내가 가끔 옆에서 들으면 미국인 엄마들 정말 따발총 쏘아대듯 영어 하던데 그 안에서 같이 잘 지내는 걸 보면 정말 대단해 보인다. 리스펙트.

그런데 '5살 연하'인 아내가 가끔 나에게 미국인 엄마들 이야기를 전할 때가 있다.

"다이애나가 그러는데 남편 데이비드는 집 잔디관리를 잘한대, 그러면서 현기도 그러냐고 물어서 내가 현기도 잘한다고 했어."

"슬론 엄마가 현기는 어디갔냐고 물어서 내가 현기는 학교 갔다고 했어."

그래, 현기는 잘하지, 학교도 잘가고.

영어의 폐해다. 노론의 영수 송시열의 후손으로서, 어르신께서 이 이야기를 들으신다면 관 뚜껑 부시고 나오려고 하시겠지만, 고정하옵소서, 여기는 미국이옵니다.

초기의 고생을 옆에서 봐서 그런지 둘 다 영어실력 느는 모습이 너무도 보기 좋다. 준서와 아내 모두 영어가 더 늘어서 친구들과 앞으로도 더 편안하게 잘 지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당분간 한국말 걱정은 좀 넣어두려고 한다.

ps. 우리 집에서 아직 유교정신이 살아있는 아이는 민서뿐이다. 민서는 영어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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