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맞이하는 두 번째 기말고사다. 잊은 줄 알았는데, 시험은 수탉처럼 또 찾아왔다. 책상 위에 어지러이 놓여있는 영어자료와 교과서가 이제 공부할 때가 되었음을 알려준다. 아내와 아이들이 모두 잠든 저녁, 나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책상 앞에 앉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카톡. 카톡.
두 번의 카톡 소리가 무거운 정적을 깼다. 이 시간에 외카톡이 아닌 쌍카톡이라니, 매우 드문 일이었다. 카카오페이 쿠폰이 지급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카카오쇼핑입니다 등과 같은 광고는 늘 외카톡이었기에, 순간 신종 스미싱인가 하는 의심부터 들었다.
카톡을 열었다. 다행히 초등학교 동창이자 오랜 친구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방정리 하다가 옛사진이 나와서 보낸다~! 새록새록하네 ㅎ 학예회때 사진인 것 같어."
스미싱을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충청도 사투리였다. 같아, 가 아니라 같어, 라니. 마치 음성지원이 되는 듯했다. "학예회때 사진 기여 아니여" 가 아닌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메시지 뒤에는 빛이 살짝 바랜 한 장의 사진이 함께 첨부되어 있었다. 한 무리의 남자아이들이 칠판 앞에 함께 서 있는 사진이었다. 벽에는 14인치 구형 텔레비전이 붙어있었고 칠판은 하늘색 커튼으로 꾸며져 있었다. 그리고 그 중간에 모자를 거꾸로 뒤집어쓴 12살의 내가 서 있었다. 93년 12월 어느 햇살 가득한 날이었다.
어쩌면 특별할 것 없는 사진이었지만, 그것을 보는 순간 나는 그때의 공기가 훅 가슴속으로 밀려들어옴을 느꼈다. 그때의 기억도 함께.
연극의 한 장면 같은 이 사진은, 실제로도 연극을 연습하는 장면이었다. 우리는 연말 학예회를 앞두고 있었고 선생님 앞에서 리허설을 진행하고 있었다. 연극의 제목은 신데렐라였고, 나는 각본과 연출을 맡아서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기도 지도했었다. 6명의 배우들은 당시 가장 친한 친구들이었는데 보다시피 다들 연기하기에 원활한(?) 상태는 아니었다.
리허설 전날, 저 중 한 명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미용실에 모여 열심히 연극을 연습했지만, 아이들이 막상 선생님 앞에 서니 전부 다 얼어붙고 말았다. 순둥순둥한 내 친구들은 메소드 연기는커녕 자기 순서만 오면 외운 대사를 아무 감정 없이 뱉어내기에 급급했고 그마저도 까먹거나 다른 대사를 하기 일쑤였다. 결국 연출인 내가 나서서 너 대사 이거야, 라고 말하는 순간을 선생님이 재미있으셨는지 사진으로 남기신 것 같다.
리허설은 좀 어리바리했지만, 학예회 당일 우리는 저 중 3명이 가발을 뒤집어쓰고 엄마 화장을 하는 등 연기혼을 불태웠다. 그 결과 작품성은 인정받지 못했지만 반 친구들에게 확실한 웃음을 선사해 주는 데에는 성공하였다.
사실 여기까지는 어슴프레 다 기억이 났다. 하지만 12살의 내 모습은 내 기억과는 좀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모자를 뒤집어쓴 것도 충격적이지만 껄렁하게 반만 쓰고 있는 건 더 충격적이었다. 감독 흉내를 내고 싶었던 건지 그냥 멋인지는 모르겠으나 존경하는 담임 선생님 앞에서 내가 삐딱하게 저러고 있었다니 지금으로서는 참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쩌면 내 안에 충만한 저런 똘끼를 내가 두 아이의 아버지라서 감추고 살고 있는 게 아닌지 잘 모르겠다.
만약 내가 저 때의 연극 성공에 힘입어 연출가를 계속 꿈꾸었다면, 지금 시카고가 아닌 나영석 PD나 김태호 PD 옆에 앉아있을 수도 있었겠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러지는 못했다. 나는 순둥이 친구들의 메소드 연기를 끌어내는데 까지는 성공했지만 내 연출혼을 꺼내는 데는 결정적으로 실패했기 때문이다. 내 연출 첫 작품이자 고별 작품이, 왕자와 신데렐라가 데면데면 해하던, 뽀글이 가발을 쓴 신데렐라가 주연 배우였던 신데렐라라니, 무척 아쉽기는 하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살짝 웃음이 나왔다. 나PD 옆에 있었으면 기말고사 안 봐도 됐을텐데, 후후. 근데 마침 내가 공부하던 페이지가 "counterfactual" 부분이었던 건 우연일까 아닐까를 생각하며 나는 다시 책장을 넘겼다.
ps. counterfactual: 현실에서 벌어지지 않은 다른 결과를 가정하는 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