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기회에 미국 생활을 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산 기간이 압도적으로 많기에 몸과 마음 모두 전형적인 한국인이다. 따라서 미국 생활이 신기하기도 낯설기도 하다. 그 와중에 나를 흔드는 미국인의 말들이 있었다. 이 공간을 통해 몇 가지 공유해보고자 한다. (작가 주)
첫째 아이가 현재 초등학교 1학년을 다니고 있다. 미국은 유치원(킨더) 과정이 정규 교육과정에 포함되어 있어, 작년에 유치원 다닌 것까지 합하면 햇수로는 벌써 2년째다. 물론 적응이 쉽지는 않았다. 태어나서 평생 한국에서만 살았고 영어를 배운 적도 없던 아이가 미국 초등학교에 쉽게 적응할리 만무했다. 그래도 다행히 씩씩하게 잘 버티면서 이제는 친구도 많이 사귀고 행복하게 학교생활을 하는 중이다. (관련 글)
첫째 아이가 학교에서 친구들을 사귀다 보니, 자연스레 그 부모들과 만날 기회가 생긴다. 목례만 하던 사이에서 안부를 묻고 조언을 구하는 사이가 되기도 한다. 등하교 길을 같이 걷거나 플레이 데이트(play date)를 함께 하기도 한다. 집에 초대를 하고 초대를 받는 과정에서 친밀도가 점점 높아져 간다. 그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한국인의 마음으로 미국 부모와 그 아이 사이의 행동과 말을 엿볼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른 그 모습 속에서 작지만 큰 깨달음이 생기기도 한다.
오늘은 등하교에서의 차이를 말해보고 싶다.
우선, 우리 집을 예로 들어보자. 첫째 아이의 등하교길은 아내가 늘 함께 한다. 걸어서 5분 거리다. 아이의 가방에는 학교에서 준 크롬북과 점심 도시락통이 들어있다. 만 6세 아이가 들기에는 약간 무거운 무게다. 그래서인지 아내는 아이의 가방을 항상 들어준다. 무척이나 당연한 듯이 말이다.
미국 아이들은 어떨까. 등교를 위해 우리 집 앞을 지나가는 몇몇 미국 아이들이 있다. 어느 날 나는 집 앞에 앉아 몇 명의 학부모가 아이의 가방을 들어주는지를 세어보았다. 6명 중 0명이었다. 아침에는 아이들이 기운이 넘치니까 그럴 수 있지, 라고 생각하며 하교길에 다시 나와 한 번 더 숫자를 세어보았다. 역시나 6명 중 0명이었다. 부모가 옆에 있었지만 가방을 드는 건 언제나 아이 몫이었다. 가방도 우리 아이 것보다 훨씬 큰 것 같은데 그걸 메고도 씩씩하게 뛰어가고 있었다.
아내에게 물어봤다. 혹시 미국 아이들 중에서도 부모가 가방 들어주는 경우가 있지 않을까? 대답은 거의 없을 걸, 이었다.
하루는 내가 하교를 위해 아이 반 문 앞에 서 있었다. 3시 30분 종이 울리고 아이가 뛰어나왔다. 그러고 나서는 자연스레 가방을 벗더니 나에게 전달하였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아이의 가방을 들어주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같은 1학년 중에 가방을 부모에게 넘겨주는 경우는 우리 아이밖에 없어 보였다.
그날 저녁 아이가 잠들었을 때 홀로 거실에 나와 아이의 가방을 다시 한번 들어보았다. 크롬북의 무게 때문인지 제법 묵직하게 느껴졌다. 문득, 미국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이 정도 무게를 스스로 감당하면서 자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이 작은 차이가 나중에 크면 얼마나 큰 차이로 나타날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아내를 통해 미국 엄마들의 생각을 물어보았다. 왜 가방을 안 들어주는지. 하지만 그들의 대답은 단순 명료했다.
"그건 그 아이의 가방이니까."
맞다, 아무리 무거워도 그건 본인의 가방이다. 본인이 책임지고 감당해야 하는 본인의 것. 어쩌면 당연한 대답인데 그게 나에게는 몹시 낯설게 느껴졌다. 혼란스러웠다.
다시 아내에게 물어봤다. 우리도 가방 들어주지 않는 건 어떨까. 난 우리 아이가 이 정도는 감당하는 아이로 키우고 싶은데. 아내는 며칠을 고민하다가 결국 가방을 들어주지 않는 쪽으로 결정했다. 당장은 아이가 힘들 수도 있지만 이런 작은 차이가 10년 후 20년 후에는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이는 그 후 며칠간 힘들어했지만, 이내 적응하여 우리 생각을 따라주었다. 물론 여전히 나는 아침에 무거운 가방 메고 나가는 아이를 볼 때면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본인의 것은 본인이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과 행동을 심어주고 싶어 그대로 유지해 볼 생각이다. 그리고 우리 아이는 아마도 잘 해낼 것이다.
미래는 이미 와 있다.
The future is already here.
단지 널리 퍼져 있지 않을 뿐이다.
It's just unevenly distributed.
- 윌리엄 깁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