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8월 시카고대학교 석사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다. 당연히 회사에도 복귀를 했다. 회사 특성상 전국 방방 곡곡에 자리가 널리 퍼져 있다. 나의 복귀 발령지는 고향인 대전이었다.
처음에는 대전 부모님 집에 머물다가 올해부터는 회사 관사에 머물고 있다. 작고 낡은 아파트지만 사무실 거리도 가깝고 교통도 좋아 만족하면서 지내고 있다.
월요일 새벽에 서울에서 SRT를 타고 대전역으로 내려와 금요일 저녁에 다시 SRT를 타고 수서역으로 올라간다. 주말은 가족과 함께 서울집에서 지낸다.
대전생활이라고 특별할 것은 없다. 낮에는 회사 일로 바쁘다. 새로 맡은 자리에 낯선 업무여서 공부할 것도 많고 챙길 것도 많다. 그러나 저녁 퇴근 후에는 내 시간이 많다. 일주일에 1~2번 저녁 약속 외에는 자유시간이다. 혼자 대전 IMAX 영화관에서 아바타 2도 보고, 근처 cgv에서 슬램덩크도 보고 그랬다. 업무로 바빴던 날은 멍 때리며 TV를 시청하기도 했다.
운동은 계속하고 있다. 최근 날이 너무 추워서 집 안에서 주로 하고 있지만,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집 근처 공원에 나가 5km 러닝을 하고 있다. 아마도 추위가 좀 풀어지면 러닝 횟수를 좀 늘릴 수 있을 듯하다. 또 날이 풀리는 대로 집 근처 수영장으로 가서 2번 정도 자유수영도 할 예정이다.
러닝과 자유수영은 철인 3종 대회를 위함이다. 재작년 시카고 트라이애슬론, 작년 미시간주 스틸헤드 ironman 70.3에 이어, 올해는 6월 18일 고성에서 열리는 "아이언맨 70.3 고성"에 참가하려고 한다. 일찍이 등록도 미리 해놓은 상태다. 오늘로 대략 140일 정도 남은 것 같다. 처음이 아니라 부담은 적지만 한국에서 참가하는 첫 대회라 긴장과 함께 기대감도 많이 든다.
회사에서 점심을 먹고 나면 혼자 산책을 나간다.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대전에 살았기에 둔산동 지리는 눈에 훤하다. 그래도 20년 만에 돌아온지라 새 건물들이 많아 보는 재미가 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옛 추억에 빠져들고는 하는데 어제 다녀온 곳은 무려 18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2005년 가을의 기억이었다.
2004년 9월 군대를 제대한 나는 곧바로 신림동에 들어갔다. 행정고시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군대 마지막 1년은 공부만 했다. 헌병대 행정계원이었던 나는 일과가 끝나는 6시부터 취침 전까지, 그리고 주말 내내 헌법과 한국사(두 과목 모두 행정고시 1차 과목)를 공부하며 시간을 보냈다. 행정일은 이미 만렙을 찍고 있었고 상병, 병장은 누가 찾지도 않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후 신림동에 들어갔기에 큰 두려움은 없었다. 나머지 기간 헌법과 한국사 문제풀이와 더불어 새로 도입된 PSAT 언어영역과 자료해석을 공부했다. 그 해 겨울은 학원과 독서실을 다니며 공부한 기억 밖에 없다.
다음 해인 2005년 2월, 처음으로 행정고시 1차 시험을 봤다. 그리고 합격해서 여름에는 2차 시험도 볼 수 있었다. 물론 그 해 2차 시험은 공부가 전혀 안된 상태에서 본 것이기에 채점하는 교수님의 노고를 덜어드리기 위해 거의 다 백지를 내고 나왔던 것 같다. 그냥 앉아서 다른 학생들이 어떻게 준비하고 시험은 또 어떻게 보는지 관찰하는 게 내게는 더 중요했다. 탁탁 탁탁, 여기저기 펜이 종이에 급하게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강의실 한가운데 한가로이 앉아있었다. 그래도 좋았다. 열심히 해서 내년에는 붙어야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첫 2차 시험을 마치고 고향인 대전으로 돌아왔다. 대학교는 휴학했다. 집 근처 독서실을 등록했다. 아침에 독서실로 출근해서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는 단조로운 일상의 반복이었다. 2차 시험 전에 신림동에서 2차 과목 1 순환 강의를 들었던 터라 어느 정도 감은 있었지만 나 스스로 기본서를 보면서 익히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2차 5과목(행정학, 행정법, 경제학, 정치학, 지방행정학) 기본서를 몇 달에 걸쳐 읽고 또 읽고를 반복했다. 1 회독하는 동안 여름이 다 지나갔고 2 회독하는 중 가을이 찾아왔다.
독서실 내 자리는 창가 바로 옆이었다. 독서실 뒤에는 초등학교가 하나 있었는데 내 자리에서 바로 운동장이 보였다. 가끔 공부가 안되면 커튼을 열어 한참 동안 운동장을 쳐다보곤 했다. 뛰어노는 초등학생들을 보면서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 하면서 머리를 식히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지 운동장이 하루종일 시끄러워졌다. 가을운동회 준비기간이었다. 아침 댓바람부터 1학년이 뛰쳐나와 부채춤을 연습했고 그 아이들 끝나면 2학년이 체조를, 또 끝나면 3학년이 무용을 하는 식이었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내내 노랫소리가 들렸다.
공부에 방해되는 소음에 기분 나쁠 만도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1학년들의 무질서함 속에서의 어설픈 부채춤이, 2학년들의 중구난방 속에서의 막체조가 내게는 큰 재미로 다가왔다. 어느 순간 노래가 흥얼거려졌고, 며칠 지나자 안 보고도 몇 학년이 나왔는지 맞출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1주일인지 2주일이지 모를 그 연습기간이 지나고 실제 운동회도 직관할 수 있었다. 아이들이 그 짧은 기간 동안 얼마나 연습을 많이 했는지 부모님 앞에서도 척척 질서 있게 집단 군무를 해내었다. 보는 내가 다 대견했다. 지금이라면 첫째 준서 생각이 났겠지만 그땐 20대 초반이라 자녀는 물론 결혼도 언감생심일 때였다.
그 해 가을은 독서실 뒤 초등학교 운동회 기억만을 남겼다. 아마도 그 외에 시간에는 공부만 해서 그런 것 같다. 그렇게 가을을 보내고 2 회독을 완전히 마치고 나니 겨울이 되어 있었다. 그다음 해 2월 1차 시험을 다시** 보고 나서야 나는 신림동에 복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해 봄 2차 과목 2 순환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당시 행정고시는 1차 시험 유예제도가 없어 한 해에 1,2,3차를 모두 붙어야 했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 어제 들른 곳은 바로 그때 운동회를 진행했던 그 초등학교였다. 대전에 있는 갈마초등학교. 걷다 보니 익숙한 곳이 나왔는데 바로 그 학교였다. 학교는 창가에서 보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겨울 방학이어서 아이들은 없었지만 운동장은 아이들이 뛰어놀던 내 기억 속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학교 앞 독서실은 보이지 않았다. 내 기억이 잘못되었나 싶어 몇 번을 둘러보았지만 그 건물이 맞았다. 독서실 대신 교회가 자리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18년 전 일이었다. 독서실이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옛 기억을 소환한 걸로 만족해야 했다.
누군가에는 별 것 아닌 평범한 학교가 나에게는 꽤 오랜 기억과 즐거운 추억을 불러일으켜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