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 노포 11시간 체험기
시작은 동대문이었다. 정확히는 흥인지문. 조선 서울 한양도성의 동쪽 문이다. 조선 태조 5년(1396)에 처음 지어졌고 고종 6년(1869년)에 다시 지은 것이라 한다.
동대문의 동(東)은 해가 뜨는 방향이다. 어둠을 뚫고 처음 해가 떠오르는 방향. 그래서 동쪽은 곧 시작을 상징한다. 우리가 동대문을 아재들의 노포생활 출발점으로 삼은 이유이기도 하다.
오전 10시 정각,
40대 아재 세 명이 동대문역 9번 출구에 모였다.
우리는 한양 4대문(大門)의 동쪽 끝에서 출발하여 낙산을 거쳐 혜화, 종로 5가, 을지로, 인사동, 북촌, 경복궁, 서촌으로 이어지는 코스를 걸으면서 그 안에 있는 노포(오래된 가게를 일컫는 말)를 방문할 계획이다.
모처럼 바쁜 일 없는 주말, 조선 중기 백성이 하루종일 먹고 놀면서 다닌다면 어떻게 돌아다녔을까를 고민하면서 만든 코스였다. 건물도 거리도 사람도 모두 달라졌지만 그때의 풍류는 어딘가에 남아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숨어있었다.
옛 추억을 안주삼아 술 한 잔 하는 것으로 보너스 같은 하루를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출발이다. 우리의 첫 목적지는 동대문 생선구이 골목이었다.
골목 어귀에 들어서자 생선 굽는 냄새가 우리를 유혹한다. 여전히 90년대에 머물러 있는 것 같은 간판들이 나란히 들어서 있다. 오전 10시, 좀 이른 감이 있는 생선구이 골목을 천천히 걸어본다. 복작복작하지 않고 조용하다. 저 멀리 닭 한 마리 가게들도 보인다. 갓 서울 올라온 20대의 내가 자주 들락날락했던 골목이다.
고향을 떠나 정 줄 곳 없던 내게 엄마와 같이 포근한 인심으로 따뜻한 밥과 생선을 내주었던 곳들이 여전히 그곳에서 영업을 하고 있었다. 불내 나는 고등어구이와 돼지불고기는 내게는 그저 집밥 그 자체였다. 그 그리움의 온기가 여전히 남아있었다. 도시 속 작은 고향에 정말 오랜만에 찾아왔다.
처음으로 들른 곳은 “송정식당”이었다. 생선구이와 함께 연탄불꼬지백반으로 유명한 곳이다.
1988년부터 장사를 시작하였다고 하니 햇수로는 벌써 35년째일 것이다. 서울 1호선 전철 개통시기가 1974년 8월이라고 하니, 아마 전철 개통으로 인한 유동인구 증가가 식당수요 증가로 이어졌을 것이고 그즈음 이러한 백반집들이 동대문 역 근처에 자리 잡기 시작했을 것이다.
35년, 그 오랜 세월 얼마나 많은 생선들이 연탄 위에서 구워졌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식당 앞에는 생선구이와 불꼬지(돼지불고기)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가게 앞에 선 나는 어느새 20살 청년이 되어 있었다. 그때 입었던 옷과 귓가에 들려오던 노랫소리가 어슴프레 기억나기 시작했다. 브라운아이즈의 "벌써 일 년", 그 시절 기억에 아련해진다. 그때 같이 왔던 친구가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잘 지내는지 모르겠다.
메뉴는 다양했다. 동대문에 들르는 각양각색의 입맛을 모두 만족시키려는 듯 여러 메뉴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물론 김치오뎅볶음 외에는 모두 낯익은 음식들이었다.
우리는 불꼬지백반, 삼치구이, 김치오뎅볶음을 주문했다.
불향이 잘 입혀진 돼지불꼬지. 달달한 간장소스를 살짝 덧입힌 돼지고기 연탄구이다. 특유의 연탄 불향이 후각을 자극한다. 고기의 익힘과 그 맛이 딱 좋았다. 이런 노포 아니면 요즘 구경하기 힘든 음식이다.
공깃밥은 기본제공이다. 달걀 반숙 프라이가 올려져 있었다. 어렸을 적 엄마가 쓱 올려서 주던 딱 그 모습이었다. 테이블에 놓여있는 참기름을 살짝 두르면 고소함이 배가 된다. 노른자를 터뜨려 밥에 살짝 비빈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꿀맛이다.
국내산 삼치구이와 김치오뎅볶음까지 더해지면 한국인의 밥상 완성이다. 순두부와 상추쌈은 기본으로 제공된다. 서울 시내 어딜 가도 25,000원에 이런 상차림을 받을 수 없다. 너무나 푸짐하다. 거기에 맛도 일품이다.
우리는 말없이 그리고 남김없이 싹싹 다 먹었다. 다 먹고 나니 포만감이 느껴졌다. 마음도 따뜻해졌다. 기분 좋게 값을 치르고 밖으로 나왔다. 다음 노포로 가기 전에 배를 좀 꺼뜨려야만 했다. 길 건너 낙산으로 향했다.
위 지도는 서울시에서 안내하는 낙산 성곽 도보 코스다. 나라말, 정부말 잘 듣는 모범시민인 우리는 저 길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걸었다. 공무원들이 다 걸어보고 제일 좋은 길로 만들었을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실제로도 코스가 정말 좋았다.
낙산은 산 모양이 낙타의 등과 같다고 하여 예전부터 낙타산 또는 낙산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시대 외세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그 낙타의 등 위에 한양 성곽을 올렸다고 한다. 당시는 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높은 성이었을 테지만, 이제는 시민들의 산책로가 되어 많은 이들이 이곳을 방문하고 있다.
조선시대 옛 성곽 안에서 21세기 도시 서울을 보면 한편으로 낯설고 다른 한편으로 신기하다. 600년 세월의 간극이 이 하나의 사진에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발전을 거듭해 온 한국의 현재 모습을 조상님들이 보신다면 얼마나 많은 감탄을 하실까.
성곽 옆 창신동은 여전히 달동네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 건축을 위한 채석장의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이주민들이 모여 사는 달동네가 되었다고 한다.
상경하고 처음 낙산에 왔을 때 산에 지어진 수많은 집들을 보며 (고향 대전과 비교할 때) 사람 참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산 위에 저렇게 많은 집이라니. ‘서울의 달’ 같은 드라마가 괜히 나온 게 아닌 것 같았다. 물론 저곳에도 꿈과 희망이 있고 삶도 있었을 것이다.
꽤 오랜 산책 후 혜화 마로니에 공원에 도착했다. 많이 걸었지만 여전히 배는 꺼지지 않았다. 송정식당 백반의 든든함이 몸소 느껴졌다.
두 번째 노포에 가기 전에 대학로 찻집에 들어갔다. 노포투어 취지에 맞추려면 ‘민들레영토’나 ‘캔모아’에 가야 했지만 전통찻집은 그 자체가 노포라는 그럴듯한 논리에 따라 카페 “오가다” 에 들렀다.
오가다의 건물은 신식이었지만 음료는 전통 있는 차였다. 왼쪽부터 석류오미자, 한라봉오미자, 달콤밀크웨이다.
예상보다 쌀랑한 날씨 속에 걸어서 그런지 따뜻한 차가 무척 반가웠다. 노포투어에 어울리지 않는 깔끔한 사진이지만 예뻐서 첨부한다. 맨 오른쪽 달콤밀크웨이는 달고나와 같은 설탕 조각이 들어간 음료다.
찻집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배가 살짝 고파왔다. 우리는 다음 노포를 향해 종로5가쪽으로 걸어갔다.
두 번째 노포는 효제초등학교 뒤에 위치한 ‘백제정육점’이다.
노란 간판이 이색적인 이곳은, 이름은 정육점이지만 실제는 고깃집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시골동네에 장사 안 되는 정육점 느낌이 강하지만, 안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문 열고 들어가는 순간 80~90년대로 바로 타임슬립이다.
(절친의) 초상권 보호를 위해 가장 비슷한 연예인 얼굴로 갈음하였다. 토요일 낮 1시 44분이다. 사람이 없어 보이지만 우리 양 옆과 뒤 테이블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빈자리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로 찼다.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도 많았고 어린 세대들도 많았다. 뭔가 백제정육점을 통해 신구조화를 꾀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그야말로 낀 세대였고 제일 어중간했다. 어르신들은 원래 오던 곳이어서 오고 애들은 힙해서 오고, 우리는 배고파서 온 것 같았다. 그래서 이왕 그렇게 보이는 김에 많이 먹기로 했다.
소고기 구이가 주 메뉴였지만 실제로는 육회가 유명한 집이었다. 다 시켜서 하나하나 맛보고 싶었지만, 가야 할 길(아니 먹어야 할 길)이 아직 많이 남았기에 소박하게 등심, 차돌박이, 육회를 주문했다.
대표메뉴 육회다. 말이 필요 없었다. 눈으로 보기만 해도 맛있음을 알 수 있었다. 좌르르 흐르는 윤기에 우리는 금세 빠져들고 말았다. 국내산 육우가 냉동이 잘되어있어 아삭아삭 씹히는 맛이 좋았다. 고소한 육즙이 일품이었다. 고추와 파가 적절히 들어가 있어서 느끼하지 않고 담백했다. 인기 있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등심은 마블링이 좋았다. 등심 한 점을 구워 육회와 함께 먹으니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밀림의 왕 사자가 된 기분이었다. 거기에 소주 한 잔 더하니 왕도 부럽지 않았다. 고기와 술이 입에서 사르르 녹아들어 갔다. 소주 맛이 너무 좋아 주문한 차돌박이는 사진도 찍지 못했다. 그냥 먹기만 했다는 이야기다.
고기가 술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개인적으로 육회를 구운 차돌박이에 싸 먹는 맛이 좋았다. 기본적으로 차돌박이가 등심보다 더 기름져서 고소함에 고소함을 더한 맛을 주었다. 다다익선이었다.
2000원짜리 양념밥도 맛보기로 시켰다. 남은 육회와 함께 슥슥 비벼먹었다. 소주의 취기가 슬슬 올라왔다. 다음 노포를 위해 취기도 가라앉히고 배도 꺼뜨려야만 했다.
종로5가로 나갔다. 차가운 공기가 폐 속으로 쓰윽 들어오며 기분이 좋아졌다.
저 멀리 광장시장이 눈에 들어왔다. 들어가서 빈대떡에 막걸리 한 잔 먹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아재들의 노포생활 시즌 2를 위해 아껴두기로 했다. 저기 자체가 하루 아니 이틀 짜리 코스였다.
광장시장은 그 자체가 서울의 역사였다. 1905년 동대문시장이라는 명칭으로 시작된 광장시장은 먹자골목보다는 한복, 이불, 포목 등 직물이 중심인 곳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1층의 번쩍거리는 식당들위로 소리 없이 많은 직물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참고로 ‘광장’이라는 명칭은 우리가 생각하는 넓은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시장 뒤편 청계천에 ‘광교’와 ‘장교’라는 다리가 있는데 그 사이에 있는 시장이라는 의미로 앞글자를 따와 광장시장이 된 것이다.
암튼 막걸리가 눈에 선했지만 떨쳐내고 을지로로 향했다.
세 번째 노포는 을지로에 위치한 ‘시골집’이었다.
간판에 씌어있듯이, 숯불로 LA갈비를 구워서 파는 노포식당이었다. 안이 매우 좁았다. 테이블이 6개밖에 없었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LA갈비에 소주 한 잔 하는 곳이었다. 주말이라 가족과 연인 손님이 주였지만, 평일에는 양복 입은 회사원들로 가득 차 있을 곳이었다. 토요일 오후 3시 30분 정도에 갔음에도 테이블이 꽉 차 있었다. 우리는 운 좋게 남은 한 테이블에 낑겨 앉았다.
간소한 기본 찬과 함께 LA갈비가 구워져 나왔다. 3인분이라 하기에는 좀 적었지만 그건 메뉴판에도 이미 써져 있었다. "셋이 먹기에는 적을 수 있습니다" 라고. 이런 솔직 담백함이 노포의 매력인 것 같다. 실제로 먹어보니 성인 3명이 오면 4인분, 아니 5인분은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사실 일행 중 2명이 (나만 빼고) LA에서 거주한 경험이 있었다.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이곳을 와보고 싶어 했다. 과연 LA갈비가 한국 노포에서 어떤 맛을 내고 있을까 하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였다.
한국의 일반적인 구이용 갈비는 뼈 방향으로 잘라내서 칼로 살을 넓게 펼친 형태이다. 그런데 LA갈비는 통 갈빗대를 뼈와 직각 방향으로 잘라서 중간중간에 조그마한 갈비뼈가 붙어있는 형태다. 그래서 마트에서 LA갈비를 사면 중간중간 조그만 뼈들이 붙어있다. LA갈비를 상징하는 가장 큰 특징이라고나 할까.
LA갈비 명칭에 대한 여러 설이 있지만, 역시나 가장 유력한 것은 미국산 소고기에 대한 인식을 좋게 하기 위해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인 LA 명칭을 붙여 마케팅을 했다는 설이다. 미국식 소고기 구이 = 미국의 세련된 도시 LA, 뭔가 그럴듯하다.
우리는 불과 한 시간 전에 백제정육점에서 소고기를 잔뜩 먹고 왔지만, LA갈비는 또 새로운 유혹이었다. 달달한 고기와 함께 소주가 들어가자 숨어있던 식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갈비뼈를 손으로 잡고 쪽쪽 빨면서 우리는 한참을 또 맛있게 고기를 먹었다. 세상 이야기에 소주잔이 멈추지 않았다.
깨끗이 다 비우고 또 길을 나섰다. 또다시 취기를 가라앉히고 배를 꺼뜨려야만 했다. 하지만 차오른 취기와 포만감은 쉬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일단 인사동으로 향했다.
인사동, 북촌, 경복궁, 서촌으로 한참을 걸었다. 외국인이 잠시 보였다가 또 한옥도 잠시 보였다가 나중에는 경복궁도 보였다. 취기에 흔히 나타나는 간헐적 기억상실 증상이 나타난 듯했다. 우리는 취해있었고 그저 기분이 좋았다. 계속 걸었다. 킵고잉.
사진을 제법 찍은 것 같은 기억인데 찾아보니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물론 내 기억과 달리 취중수다하느라 아마 안 찍었을 것이다. 중요치 않았다.
한참을 걷다 보니 어느새 저녁 7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술시 戌時' 였다.** 아재들이 농담 삼아 이야기하는 술이 술술 들어가는 시간인 ’술시 戌時'가 다가오고 있었다. 조선의 DNA를 물려받은 우리의 몸은 또다시 술을 원하고 있었다. 다음 노포를 찾을 시간이 되었다.
**술시(戌時)는 십이간지 시간의 열한째 시간을 의미하며 오후 7시부터 오후 9시까지를 말한다.
서촌(西村)에 왔다. 서촌은 경복궁 서쪽에 위치해 있다. 아마도 왕의 궁궐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서촌으로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같은 의미로 경복궁 북쪽에 자리 잡은 마을은 북촌으로 불리고 있다.
서촌은 조선 시대 통역관이나 의관 등 중인과 예술가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반대로 북촌은 관직이 높은 관리들과 대대로 큰 권세를 누린 양반들의 집이 모여 있던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서촌은 여전히 활력이 넘치고 북촌은 좀 조용한 편이다.
위 사진 중 왼쪽은 서촌, 오른쪽은 북촌이다. 같은 상점이라도 분위기가 이리 다르다.
오늘 마지막 노포는 서촌에 위치한 ‘강구 미주구리’였다.
노포스러운 얼룩덜룩 흐릿한 간판이다. "강구(江口)"는 경북 영덕군에 있는 지역 이름이다. 한자에서 알 수 있듯 마을이 강 어구에 있어 붙은 명칭이다.
"미주구리"는 영덕 지역에서 즐겨 먹는 기름가자미 회를 의미한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 따르면, 미주구리라는 별칭은 물가자미를 의미하는 일본어 단어인 미즈가레이[みずがれい]가 기름가자미를 이르는 말로 토착화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동해안 지역에서는 기름가자미와 물가자미 모두를 ‘미주구리’로 혼용하여 칭하고 있다.
술시여서 그런지 식당 안에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다들 회 한 사라에 소주 한 잔 들이켜고 계셨다. 주말 일과의 끝이 이런 노포에서의 회와 소주라면 인생 살만 할 것 같았다. 취기 속에서 선택이 어려워 대표메뉴를 주문했다.
'미주구리 세꼬시'
주인은 영덕별미 가자미를 뼈까지 통째로 썰어 회로 만들어 내놓는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벌써부터 입 안에 침이 고였다. 아마도 가자미 살이 부드럽고 뼈가 연해 가능한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접시 가득 가자미 회가 나왔다. 미역과 양파, 고추, 마늘이 한쪽 귀퉁이를 차지하는 영덕표 회 한 사라였다. 우리는 그전까지 먹은 육고기를 잊은 채 바닷고기 맛에 열중했다. 꼬득한 뼈와 고소한 살이 좋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회 한 점에 소주 한 잔, 또다시 술술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술시 내내 우리는 처음 만난 사람처럼 대화를 나누며 즐거운 저녁식사를 했다. 마지막 노포라는 것이 아쉬웠지만 이별은 또 다른 만남의 기약이기에 우리는 아쉬움을 달래며 마지막을 함께 했다. 술시가 끝나고 우리는 터덜터덜 마지막 노포를 걸어 나왔다.
경복궁 역이 눈앞에 보였다.
아침 10시부터 저녁 9시, 장장 11시간 동안 한양 4대문(大門)의 동쪽 끝에서 출발하여 낙산을 거쳐 혜화, 종로 5가, 을지로, 인사동, 북촌, 경복궁, 서촌으로 이어지는 코스를 걸으면서 그 안에 있는 4군데 노포를 방문했다. 이제 헤어질 시간이다.
우리는 마지막 인사로 아재들의 노포생활 시즌 2를 기약했다.
우리 모두 더 아재가 되어서 만나요.
끝.
< 노포 정보 >
1. 송정식당 : https://naver.me/GTgSofEu
2. 백제정육점 : https://naver.me/5VeAeHj1
3. 시골집 : https://naver.me/GKox7xt1
4. 강구미주구리 : https://naver.me/xorKtOA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