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3월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그룹이 1집 정규앨범을 가지고 혜성같이 등장을 했다. 당시 사회는 그들의 음악, 댄스, 퍼포먼스, 패션 등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기에 말 그대로 혜성 같은 등장이었다.
그들의 첫 TV 등장을 나는 우연히 직관할 수 있었는데, 내가 자주 보는 프로그램에서 데뷔를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는데 멍하니 바라보다가 다 끝나고 나서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와..”
정말 큰 충격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사회도 충격을 받았다. 소방차, 박남정으로 대표되는 그 시절 댄스 가요라 불리는 음악이 아닌 그냥 대놓고 "이게 새로운 장르다"를 보여주는 획기적인 변화의 시작이었다.
그러고 며칠 지나지 않아 중학교 앞(당시 우리 집은 중학교 근처였다)은 서태지와 아이들 엽서, 브로마이드, 책받침으로 도배가 되었다. 모든 아이들이 난 알아요 춤을 췄고 그 랩을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새로운 대중가요의 서막이 열렸고 젊은 세대는 열광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 거의 매년 서태지와 아이들은 앨범을 냈고 거의 다 히트를 쳤다. 특히, 3집 "발해를 꿈꾸며", "교실이데아"를 통해 시대정신을 노래에 담기 시작했다. "통일"과 "입시제도"를 그 누구보다도 영향력 있는 서태지가 노래로 불렀으니 문화대통령도 허명이 아니었을 것이다.
1995년 발매된 서태지와 아이들 4집은 내가 태어나서 가장 많이 들었던 테이프였다. "컴백홈"(가출 청소년 문제)과 "필승"으로 대표되는 대중인기곡도 있었지만 해당 앨범의 백미(白眉)는 아마도 가사를 전부 삭제하여 발매한 "시대유감"이라는 곡일 것이다.
90년대에는 음반이나 영화가 발매되기 전 사전에 심의를 받았다. 공륜이라 불렸던 공연윤리위원회라는 곳이 심의 주관 기관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 4집 음반도 이곳에서 사전심의를 받았는데, 심의결과 일부 가사가 사회 비판적이라는 이유로 삭제를 요구당했다. 아래 가사들이다. (지금 보면 어디가 문제이지 라고 생각할 정도 무난한 가사지만 당시는 그랬다)
나이 든 유식한 어른들은 예쁜 인형을 들고 거리를 헤매 다니네
정직한 사람들의 시대는 갔어
모두를 뒤집어 새로운 세상이 오길 바라네
서태지는 이에 불복했고 해당 가사를 고치지 않고 아예 가사 전체를 들어낸 뒤 4집 앨범을 발매했다. 가사 없이 멜로디만 있는 노래가 심심할 수밖에 없었지만, 대중과 팬들은 그러한 멜로디를 들으며 사회의 부조리에 저항하는 아이돌에 지지를 보냈고 결국 음반사전심의제도의 폐지(사후심의제도로 개정)를 이끌어내는 발판이 되었다.
4집이 서태지와 아이들 마지막 앨범이었는데, 어쩌면 4년 가까이 여러 사회적 이슈로 세상을 다 흔들어놓고 "우리가 시도할 수 있는 건 다 보여 주었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홀연히 은퇴하였다. "박수칠 때 떠나라"라는 말을 가장 멋지게 실천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마지막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 은퇴 이후 30년이 지났다. 여전히 우리는 불신, 부정, 혼란, 부패와 같은 부정적 키워드와 함께 살아가고 있으며 개혁, 혁신, 혁명, 전복, 전환 같은 능동적 단어보다는 포기, 자조(自嘲), 안일, 회피, 부동 같은 수동적 회의적 단어에 익숙한 채 살아가고 있다.
오랜만에 시대유감(時代遺憾) 노래를 들으며, 문득 서태지라는 아이돌을 좋아했던 30년 전이 그립고 사회적 혼란과 갈등 속에서도 변화를 꿈꾸고 실제 실행했던 그 시대의 역동성이 부러워졌다.
만약 서태지가 지금 등장하였다면 아마도 저출산, 저성장, 고령화의 침체된 시대에 유감을 표하며 변화를 꾀해줄 영웅이 나타나기를 바라며 노래를 부르지 않았을까 한다. 그날이 아마도 서태지가 말한 "두 개의 달이 떠오르는 밤"일 것이다.
바로 오늘이 두 개의 달이
떠오르는 밤이야
네 가슴에 맺힌
한을 풀 수 있기를
오늘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