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겨울매미 Mar 02. 2022

나의 외국인 이웃들에 대하여

<공동선> 163호 (2022년 3~4월호) 게재


2000. 7. 31. 월. 맑음

     토요일 밤에 라흐만이 왔었다. 우리 가족과 라흐만은 모두 함께 둘러앉아 닭고깃국과 밥을 먹었다. 라흐만은 고향에서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식사하던 것이 생각난다고 했다.



     내 오래된 일기장 속에는 라흐만과 우리 가족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2000년도에 나는 고등학교 1학년, 언니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고 우리 가족은 군산에 살았다. 군산의 ㄷ제지공장에서 일하던 방글라데시인 라흐만은 우리 부모님이 운영하시던 속옷 가게에 물건을 사러 왔다가 우리와 친해졌다. 쉬는 날이면 곧잘 놀러 와 우리 가족과 함께 식사도 하고 산책도 했다. 라흐만은 한국말을 잘했고 나는 그랑 얘기하는 게 재밌었다. 우리 가족 모두 그를 좋아했다. 


     IMF 사태의 여파가 계속 이어져 부모님이 운영하시던 가게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아버지는 라흐만이 일하는 그 제지공장에 가서 일하시다가 일이 너무나 고돼 며칠 만에 앓아누우시기도 했다. 얼마 후 라흐만은 군산을 떠나 경기도 어딘가로 옮겨 갔다. 그런 뒤에도 그는 우리 아버지랑 종종 통화를 했는데, 통화할 때마다 자기 있는 곳에 꼭 놀러 오라고 했다. 우리 가족은 자가용이 없었기에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은 버스, 기차, 또 버스를 갈아타는 기나긴 여정이었다.



2001. 8. 14. 화. 맑음

     과연 이 이야기를 누구에게 온전히 전할 수 있을까? 푹 쉬며 여독을 풀고 나니 가슴속에는 그들에 대한 아린 그리움과 고마움이 피어날 뿐이다.

     우리는 드디어 라흐만을 만나러 간 것이었다. 벌써 오래전부터 간다, 간다, 하면서 못 갔던 것을 일단 결정하자 입석 기차를 세 시간씩 타고서도 기쁘기만 한 마음으로 갈 수 있었다. 밤 8시 반쯤 월곶마트 앞(군하리)에서 만난 그는 우리를 무척이나 반가워했고, 슈퍼에서 물건을 사면서 우린 손님이니까 절대 돈을 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택시비도 라흐만이 냈다.

     라흐만이 일하는 공장 숙소에 도착해서 우린, 그와 함께 일하고 있는 라나, 라쥐, 코콘을 만났다. 모두들 우리를 반가워했으며, 선량한 사람들이었다. 이 공장에는 사장의 매형인 공장장과 그 부인(사장의 누나)이 머물면서 일하는데, 내일 아침에 올 거라고 했다. 그들은 방글라데시인들을 믿고 공장일을 완전히 맡겼다고 했다. 또한 일이 그렇게 많지 않고 기계가 다 하기 때문에 야간작업 때도 세 시간만 열심히 일하면 나머지 시간에는 잘 수 있다고 했다. 전에 군산에서 라흐만이 일하던 ㄷ제지공장의 지옥 같은 작업 환경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우리 모두는 함께 이것저것을 좀 먹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와 언니는 라나의 방에 가서 그의 오디오 세트로 CD 음악을 듣기도 했다. 그런 후 라흐만과 함께 공장을 구경했다. 이 공장에서는 폴리에스터 실을 열처리하여 울리 실, 즉 스타킹을 만드는 실로 가공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날은 코콘과 라나가 야간 근무 중이었다.

     라쥐는 다카에 있는 자기 집에서 살 때 찍은 사진들을 보여 주었다. 귀여운 아들과 딸, 부인, 아버지와 형, 멋진 집……. 라쥐의 눈은 너무나도 간절했고, 그는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한다고 했다. 그의 어린 아들이 자꾸만 아프고, 부인이 그를 기다리기 때문에 내년이면 고국으로 다시 돌아갈 예정이라고 했다.

     우리 가족은 그들이 안내해 준 방에서 잤는데, 다음 날 아침에서야 그들이 하나뿐인 침실을 우리에게 내주고 자신들은 소파에서 잤다는 걸 알고 너무 미안하고 고마웠다.

     라쥐가 우리를 위해 명절에나 먹을 수 있는 특별한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공장장님과 사모님도 왔다. 그들은 생각했던 대로 좋은 사람들이었으며 우리를 무척 반가워했다. 라쥐, 라나, 코콘, 라흐만, 우리 가족, 공장장님 부부는 모두 함께, 라쥐가 만든 fried rice를 먹었는데 정말 맛있었다. 식사 후 내가 라흐만의 한글-방글라 사전을 들여다보고 있었더니 라흐만이 내게 그 작은 사전을 선물로 주었다. 너무 고마웠다. 

     가야 할 시간이 가까워지자 마음이 아쉬워졌다. 라흐만은 우리더러 자꾸 더 있다 가라고 했다. 내가 재미로 ‘생선과 손님은 사흘이 지나면 냄새가 난다.’라는 영어 속담을 말했더니 그는 막 웃으면서, “우리 나라에선 안 그래요. 손님이 6개월 동안 있어도 한 번이라도 주인이 손님한테 나쁘게 하면, 그동안 기도한 거 다 소용없어져요. 알라신이 화나요.”라고 말했다. 

     우린 점심 전에 갈 참이었는데, 공장장님 내외가 식사를 주문해 두셔서 생각지도 않게 함께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식사 후에 공장장님이 불러 준 택시를 기다리면서 우리 모두는 아쉽게 악수를 나누었다. 나는 라쥐에게 (라쥐만 한국어를 잘 못 하므로), “아바르 데카 허베.(다시 뵙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택시에 타서 손을 흔들며 우린 헤어졌다. 집에 돌아오는 내내, 집에 돌아와서도 나는 가슴이 아팠다. 우리를 아무런 사심 없이 반겨 주고 기다려 준, 그리고 진심으로 우리를 극진히 대접해 준 고마운 라흐만과 그의 친구들. 앞으로도 절대 그들을 잊지 못할 것이다.



     라흐만은 몇 년 뒤 방글라데시로 돌아간 후까지도 간간이 부모님과 통화를 하며 소식을 주고받다가 세월의 흐름 속에 점차 연락이 뜸해졌다. 그가 고국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 내가 사는 지역은 길을 걷다 마주치는 사람 열 명 중 일고여덟 명이 외국인일 정도로 외국인 노동자 인구 비율이 높은 곳인데 그래서 더더욱 라흐만이 생각난다. 라흐만이 군산의 ㄷ제지공장에서 날마다 한국인 동료들에게 ‘껌둥이’ 소리를 들어가며, 그리고 손이 기계에 말려 들어가 화상까지 입어 가며 힘들게 일하다가, 휴일이면 우리 집에 와서 우리 어머니가 끓여 준 닭고깃국을 우리 가족과 함께 맛나게 먹던 바로 그 무렵, 그는 지금의 내 나이보다 열 살이나 어린 청년이었다. 그 생각을 하면 마음이 짠하다.


     가끔 우리 동네에 대해 “거긴 외국인 노동자가 너무 많아서 위험해.”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몹시도 섭섭하고 억울한 마음이 든다. 물론 외국인 노동자들 중에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 위험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한국인들 중에는 그런 사람이 없단 말인가. 적어도 내가 지금까지 경험한 바로는 우리 동네 골목골목과 마트에서 마주치는 외국인 노동자분들 대부분이 그저 평범하고 선량한 이웃, 가난하고 무해한 사람들이다. 바로 나처럼 말이다. 

     ‘외국인’이자 ‘노동자’라는 이유로 나의 이웃들을 위험한 존재로 치부하는 일부 한국 사람들보다는, 외국에서 온 가난한 내 이웃들에게 나는 훨씬 더 연대감을 느낀다. 가난한 이, 노동하는 이로서의 이 연대감은 아마도 이십여 년 전 그 순수했던 청년 라흐만이 내 마음속에 심어 준 소중한 선물일 것이다.   <끝>

매거진의 이전글 하느님한테 전화를 할 수가 없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