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선> 162호(2022년 1, 2월호) 게재
“하느님 전화번호 좀 알아봐 줘요. 내가 전화해서 따져야겠어!”
내 술주정에 남편은 몹시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난 진지하다. 천장이 빙빙 돌고 발음이 사정없이 꼬이긴 해도, 아직 제정신이다. 얼마 전 지인의 부친상에 조문(弔問)을 다녀온 이야기로 시작해, 지금까지 겪어 왔고 앞으로 또 맞이하게 될 사별(死別)들을 생각하며, 더운 정종에 촉촉이 젖은 밤. 술기운에 나온 말이지만, 평소 심정 그대로다. 나는 늘 항의하고 싶다. 만들려면 잘 만들지, 왜 이렇게 우리 모두를 결국은 가슴 치며 헤어지도록 만들어 놨느냐고.
사별의 쓰라림을 처음 실감한 건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그날이 마지막일 줄은 모른 채 할머니를 뵈러 병원에 갔다. 인사를 마치고 돌아서는데 할머니께서 냉장고에 주스 있다고, ‘호랑’에 넣어 가서 마시라고 하셨다. 병실 냉장고 속에서 당근 주스 한 병을 꺼내 호주머니에 넣었다. 집에 와 그 당근 주스를 거실 탁자에 꺼내 놓은 채 급히 다시 병원에 가야 했다. 할머니께서 임종하신 것이다. 그리고 며칠 후, 장례를 마치고 집에 와서 그 주스를 마셨다. 달고 시원한 액체가 내 목구멍과 식도, 내장을 훑었다. 비로소 실감이 났다. 이젠 할머니가 세상에 없구나. 다시는 ‘호랑’에 넣어 가라고 간식을 챙겨 주지 못하시겠지. 나는 간혹 그 간식들을 귀찮아한 일도 있었는데....... 마음이 아팠다. 이렇게 헤어질 줄 모른 채 무심히 보낸 모든 순간이 견딜 수 없이 미안했다. 그런데 이 미안함을 만회할 길이 없다니. 너무도 차갑고 혹독한 ‘부재(不在)’의 느낌에 나는 몸서리쳤다.
그때부터 나는 누구와의 관계에서든 당근 주스를 마시게 될 순간이 올 거란 사실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늘 무서웠다. 그렇다. 나는 사별이 너무나 두렵다. 상갓집에 가면 기어이 눈물을 쏟고야 마는 것도, 실은 다 겁이 나서다. 문상(聞喪)을 갔을 때뿐 아니라 일상생활 속 어느 때라도, 밥을 먹다가도 장을 보다가도, 사별만 생각하면 무서워서 울게 된다. 정든 누군가가 훗날 세상을 떠날 걸 생각하면 태평양 한가운데 홀로 널빤지를 타고 떠도는 듯 하염없는 두려움이 무장무장 몰려온다.
가만 보면 내 두려움은 미안함에 연결돼 있다. ‘내 어머니, 아버지도 언젠간 세상을 떠나시겠지.’라는 생각과 동시에, 지금껏 부모님께 쌀쌀맞게 군 모든 순간들이 한꺼번에 되살아나서는, 기마 군단처럼 쿵쾅쿵쾅 날 마구 밟아 댄다. 또한 내게 가장 가까운 존재인 우리 남편, 이 사람과도 어느 땐가는 사별하게 되리란 생각이 들면, 여지없이 그때 그 슬픈 목소리가 떠오른다. 3년 전, 남편이 술 먹고 늦게 들어왔다고 내가 토라져서 “내 몸에 손대지 마요!”라고 쏘아 붙였을 때 “아, 네.......” 하며 잦아들던 그 슬픈 목소리. 동시에 여태껏 내가 그를 향해 상냥하지 않게 발음했던 모든 음절들이 또박또박 되살아나 회초리처럼 사정없이 내 심장을 후려친다.
“하느님 전화번호 좀 알아봐 달라니까요. 전화해서 따지게!”
내가 발을 거듭 구르자 남편의 동공이 흔들린다.
“아, 그건 좀.......”
그래, 나도 안다. 그건 좀 어려운 일이란 것을. 단 한 번도 내 부탁을 거절한 적 없는 남편이지만 이번 요구만큼은 들어줄 수가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내 남편은 무신론자다.) 나는 깊은 한숨을 쉬며 드러눕는다. 남편도 내 옆에 털썩 눕는다. 천장이 빙빙 돈다. 점점 빠르게 돈다. 고개를 돌려 남편의 옆얼굴을 본다.
‘언젠가 우리도 헤어져야 하겠지. 먼 훗날 오늘을 그리워하겠지.’
또 눈물이 난다. 무섭지만 다른 도리가 없다. 곁에 있는 이에게 손을 뻗는 수밖에. 하느님한테 전화를 할 수가 없어, 나는 남편의 뺨을 만진다. 하느님한테 항의하는 대신, 남편 귀에 대고 “사랑해요.”라고 말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