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이사를 앞두고 짐 정리 하느라 집안을 온통 헤집으며 한창 땀을 흘리고 나니, 문득 일 년 반 전 이 집에 이사 오던 때의 설렘이 떠오른다. 남편과 나는 이 작고 평온한 시골 마을에 살게 된 걸 얼마나 기뻐했던가. 또한 지금까지 둘이서 살아 본 집들 중 가장 밝고 쾌적한 이 집에서 펼쳐질 나날을 얼마나 기대했던가. 실제로 우린 이 마을의 눈부신 햇살을 마음껏 받으며 신나게 돌아다녔고 이 집에서 즐겁고 편안하게 지냈다.
그랬는데 나의 우울증과 공황장애가 점차 심해지면서, 그리고 최근에 와서 불미스럽게 학교를 쉬게 되면서, 이 마을은 그리고 이 집은 빨리 떠나야 할 곳이 되고 말았다. 생각해 보면 여기서 참 행복했는데 요즘에 와서는 그 행복했던 기억은 다 잊은 채 자꾸만 이 집을 무겁고 슬픈 분위기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미안하다. 참 미안하다. 누구한테 미안한 걸까? 이 아름다운 마을에게, 그리고 이 소중한 집에게. 또한 나에게 최대한 좋은 환경을 마련해 주려고 그토록 마음 써 온 남편에게. 무엇보다도, 바로 나 자신에게. 무엇이 미안하냐 하면, 충분히 행복해하지 않은 것이 미안하다. 마음 놓고 행복해하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
이런 미안함, 분명 전에도 느껴 본 적이 있는 감정인데, 하고 갸웃거리다가 나는 아래의 시를 생각해 냈다. 오래 전 대학생 때 쓴 ‘이사’라는 시. 그때는 ‘보랏빛 곰팡이 뭉게뭉게 춤추는’ 누추한 집을 떠나며 이 시를 썼다. 그리고 지금은 그때보다는 훨씬 더 살기 좋은, 햇살이 환한 집을 떠나려는 참이다. 그런 점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주된 감정은 같다. 미안함. 충분히 행복해하지 않은 미안함. 삶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한 미안함.
미안하다. 그래서 더 행복해지겠다. 삶을 더 사랑하겠다.
이사
박현경
너도 지칠 만큼 지쳤겠구나
나도 엔간히 지쳐 너를 떠난다
미안하다
숱한 날이 흐르는 동안
도무지 너를 사랑할 줄 몰랐구나
네 조그만 외눈이 내게 볕을 지어 주었으니
보랏빛 곰팡이 뭉게뭉게 춤추는
네 짓무른 가슴팍에 이 몸을 기댄 채
나는 책을 읽었구나 네 몸이 썩는 동안
그 물큰한 살냄새 나를 토닥여 주어
나는 책을 읽었구나 눈앞 캄캄해지도록
사람들의 눈초리를 차마 견디지 못하고
책을 읽었구나 몰래 너를 미워했구나
미안하다
숱한 날이 흐르는 동안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구나
너와 사는 동안 낮게 뇌까렸던 말들이
생선가시처럼 목에 쓰리게 걸린다
(2005년)
* 혹시나 하고 대학교 때 일기장을 뒤져 봤더니 이 시를 썼던 초고가 남아 있었다. 그 일기장 사진을 함께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