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선물
버스를 타고 가면서 머리를 마구 굴렸다. 내가 가고자 하는 뮤지엄이 이 버스 노선의 중간 지점쯤에 있다. 이왕 버스를 탄 거 코스 종점까지 가서 내리는 것이다. 나의 특기인 걷기 여행하며 다시 걸어서 거슬러 뮤지엄까지 올라오는 방법이 첫 번째. 아니면 뮤지엄에서 내려 바로 뮤지엄부터 보는 것이 두 번째. 쉬이 결정이 나지 않아 고민하면서 창밖을 본다. 여느 시골과 별다를 것 없는 흔한 시골풍경이다.
제법 달려 올라가는 걸 보며 버스 타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다른 감흥도 없고 썩 걷기 좋은 길도 아닌 길을 걸었으면 재미없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꼬불꼬불 시골길을 달려 제법 고도가 높은 곳으로 올라가자 이제까지 그저 흔한 시골 풍경이었던 것이 나의 입이 쩍 벌어지게 만드는 풍경으로 바뀌며 장엄하게 펼쳐졌다. 바로 테시마 뮤지엄이 있는 곳이었다. 계단식 토지들이 바다를 향해 아래로 크게 펼쳐져 있었고 그 아래로 짙게 푸르디푸른 바다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버스에 가득 찼던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미술관에서 내린다. 아무런 망설임도 없다. 모두들 저 뮤지엄이 이 섬 여행의 목표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리지 않았다. 다들 내리고 빈자리를 하나 골라 앉았다. 일단은 다리도 아프고 악기 보호한다고 신경을 곤두세워서인지 버스 의자에 앉자 피로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버스는 다시 출발했다. 남들이 안 하는 행동을 하자면 특히나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 곳에서라면 약간의 불안감은 필수다. 이거 잘하는 행동인가?
차 안에는 나를 제외하고 세 명의 동양인 아가씨가 남았다. 나 혼자였다면 분명 알 수 없는 불안감 내지 약간의 무서움이 피어올랐을 것이다. 그런데 미묘하게 안심이 된다. 이 안도감과 왠지 모를 위로감 같은 것은 분명 저 세명의 아가씨들이 준 힘이다. 저 사람들도 가는 곳이니 영 잘못된 곳으로 가는 건 아닐 것이다.
이 버스의 종점은 카라토라는 이름의 아주 조그마한 항구였다. 정말 조그맣다. 아무것도 없다. 버스는 그 항구에 우리를 내려놓고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이 쌩 돌아가버린다. 당황스럽다. 오메.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어촌 마을의 항구라니 이게 무슨 일인가. 저 아가씨들은 여기를 왜 온 것인가? 그러나 그런 생각과 동시에 그래도 괜찮다. 뭐 어차피 사람이 없는 곳들을 나는 더 좋아하니까.
그리고는 마을을 향해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처음에 아무것도 없는 조그만 항구에 내렸을 때의 막막함보다는 마을로 깊이 들어가 이 집 저 집 유심히 관찰하며 걸을 땐 만족감이 올라왔다. 어떤 집의 담벼락은 나무의 색이 정말 예술이었다. 어떤 집은 담의 재료가 독특했다. 담 들 만 구경해도 재밌을 지경이었다. 가는 곳마다 우쿨렐레를 세워두고 사진을 찍었다. 내 악기의 인생샷들이 이번 시코쿠 여행하며 많이 나올 듯하다.
이 깊은 어촌 마을에도 게스트하우스가 있다. 카페도 있다는 것에 놀라며 정원을 손질하고 있던 젊은 게스트 하우스의 주인 아가씨와 마주쳤다. 하루 종일 있어도 별다른 일 하나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이런 작은 어촌마을에서 저 젊은 친구는 어떠한 삶을 만들어 가며 살고 있을까 궁금했다. 또 남의 삶에 오지랖 생각 갖다 놓는다는 생각도 하면서. 그러면서 계속 걸었다. 마을이 얼마나 작은지 한 바퀴 돌았는데도 시간은 얼마 지나지 않았다.
푸른 바다를 등지고 등대가 저 멀리 보이는 곳에서 영상이 찍고 싶어 아슬아슬해 보이는 곳까지 걸어가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다. 그렇게 영상을 찍기도 했는데 나중에 확인해 보니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못했다. 바람도 거세고 신경이 곤두선 상태라 노래도 흡족하지 못한 상태랄까. 써먹지도 못할 영상 찍느라고 애만 썼다.
그렇게 바닷가에서 영상을 찍은 뒤 마을 쪽으로 나오다 예쁜 장면에 걸음을 멈춰 섰다. 나릇나릇하게 걷고 있던 고양이 한 마리와 노인용 의자 유모차에 기대어 천천히 걷던 할머니의 동행. 사진과 영상을 마구 찍어댔다. 조금 있으니 한 마리가 아니다. 한 마리가 나타나고 또 한 마리가 나타나고. 이 녀석들과 할머니는 동고동락하는 막연한 사이인지 할머니의 존재에 그 어떠한 경계도 없다. 오로지 이방인인 내가 경계의 대상이다.
최대한 나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고 숨죽여 쭈그려 앉은 채로 그들을 찍었다. 보기만 해도 웃음이 새어 나오는 예쁜 풍경이었다. 오늘 이 섬에서 이것 장면들을 본 것만으로도 나의 감사함의 만족치는 할당량을 다 채운 기분이 들만큼 그렇게 예쁜 풍경이었다. 그곳에서 한참을 놀다 다시 길을 걸었다. 시계를 보니 슬슬 뮤지엄 쪽으로 이동을 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뜻밖에 생각지도 못했던 이 조그만 어촌마을에서 좋은 시간을 보냈다. 떠나기 아쉬워 바다를 등지고 다시 노래 영상을 하나 찍었다. 이번 여행에서 제일 큰 아쉬운 점이 영상을 촬영할 삼각대가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곳의 지형지물을 이용하고 최대한 물병이나 안경집 같은 걸 활용해서 휴대폰을 세워 놓고 촬영했다. 구글지도를 확인해 보니 이 마을에서 테시마 아트 뮤지엄까진 그다지 멀어 보이진 않았다. 살살 걸어 올라가면 될 듯하다. 시간도 적당하다. 오늘 왠지 준비되지 않은 것에 비해선 일정이 순조롭고 좋다.
커다란 자몽이 초록의 나무 위에 탐스럽게 열려 있는 것도 예쁜데 그 밑에 마구 떨어져 있는 풀밭 위의 과일 풍경이라니 이건 또 그냥 못 지나치지. 그곳에 우쿨렐레를 세워 두고, 눕혀두고 이리저리 사진 놀이를 한다. 또 지나가는 마을의 입구에 있던 컬러풀한 돌의자에서도 시간을 보낸다. 예쁜 풍경들을 자꾸 만나니 씩씩하게 걸어가려야 갈 수가 없다. 그러니 지치거나 힘들일도 없다. 조금 걷다 멈춰 사진 찍고, 또 걷다 멈춰 찍고 하다 보니 아주 느린 산책 수준이다. 힘들일이 하나도 없다.
쉬엄쉬엄 그렇게 사진놀이하며 걷다 보니 아까 버스에서 마주친 그 어마어마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한적하고 사람을 마주치기 어렵던 어촌 마을에 비해 테시마섬의 모든 사람이 그곳에 모여 있나 싶을 만큼 그곳엔 사람들로 북적였다. 뮤지엄 앞에 넓게 펼쳐진 잔디 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 누워 있는 사람들, 서서 걸어 다니는 사람들, 뮤지엄 사무실 건물 앞에 줄 서 있는 사람들, 안내요원 같은 사람들의 움직임, 버스나 택시들 그리고 자가용이 주차되어 있는 주차장엔 제복을 입은 기사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다. 진짜 테시마 아트 뮤지엄에 온 것이 실감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