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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정 Mar 04. 2024

나를 키운 8할에 대해 쓰기

애쓰는밤 240302

방에 있던 책장 하나를 버렸다. 나와는 무려 20년을 함께한, 오래된 책장이었다. 그 책장은 내가 한우리빌라 반지하에 살던 때, 태어나 처음으로 내 방이라는 것을 갖게 되었던 때에 아빠가 만들어준 것이었다.


아빠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 그러니까 내가 막 걸음마를 시작했을 즈음부터 철물점을 운영하셨다. 경성중고등학교 사거리, 마주 보고 주유소가 자리하고 있던 대로변이었다. 유리로 된 미닫이 문을 열고 철물점 안으로 들어서면, 바닥 장판과 보일러가 깔린 널따란 평상이 하나 있었다. 그곳은 주로 동네 아저씨들의 다방이자 식당이었고, 때때로 동서양을 막론한 각종 카드가 난무하는 하우스였다.


나는 철물점 구석에 놓인 석필을 하나씩 꺼내다가 가게 앞 보도블록에 그림을 그리며 놀았다. 그러다가 질리면 가벼운 드라이버를 들고 못과 나사들이 종류별로 쌓여있는 가판대 앞에 서서 낚시질을 시작했다. 내가 가져다 댄 드라이버에 붙어 딸려오는 못들을 볼 때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꺄르르 웃었다.


어린 시절 내게 아빠는 못 고치는 것이 없는 마법사였다. 당연하게도 청소년이 될 때까지 나는 세상의 모든 아빠가 다 그런 줄 알았다. 고장 난 가전 수리는 물론이거니와, 행거나 책장까지도 전부 뚝딱뚝딱 만들어내는 줄 알았다.


내가 책상과 책장이 필요하다고 말했을 때 아빠는 어디선가 두꺼운 나무판자 몇 개와 망치, 타카 같은 것들을 들고 나타났다. 그리고는 노란색과 흰색 페인트를 섞어 내가 좋아하는 레몬색 페인트를 만들었다. 나는 신이 나서 재단된 나무판자에 열심히 붓질을 했고, 아빠는 열심히 못질을 했다. 기다란 책상과 책상 상판에 얹어놓을 만한 커다란 책장이 금세 완성되었다.


한우리빌라에서 나오면서 책상은 건축폐기물이 되었지만, 레몬색 책장만큼은 계속 들고 다녔다. 새로 사기가 귀찮아서였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나는 그 책장보다 마음에 드는 것을 찾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랬던 책장이 20년이 지나니 수명을 다하고 말았다. 다시 나무판자로 돌아간 채 아빠의 트럭에 실려 어딘가에 버려졌을 레몬색 책상처럼 책장 또한 대형 폐기물 신고 필증을 붙인 채 우리 집 문 앞에 내어졌다. 이제 내 방에는 오랜 시간 책장과 함께했던 사진 앨범과 졸업장 바닥에 눌어붙은 레몬색 페인트만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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