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 엄마의 생명줄은 내 손에 쥐어진 적이 없었다
Day18 ; 천안
어디든 여행을 가면 미술관에 가보는 것을 즐기는 편이다. 제주의 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회가 보고 싶어서 예정에도 없던 제주 여행을 떠났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는 이상하게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가볼 기회가 생기지 않았다. 가볼만한 전시회가 있나 검색은 틈틈이 하곤 했는데 뭔가 끌리는 곳을 찾지 못했었다. 그렇게 흘러온 천안에서, 가보고 싶은 미술관을 발견했다. 무려 두 곳이나.
천안에 도착한 첫날 방문한 곳은 아라리오 갤러리였다. 천안 터미널 바로 옆에 위치한 이 갤러리는 얼마 전 방탄소년단의 RM이 방문 인증샷을 SNS에 올려 화제가 됐던 곳이기도 했다. 알고 갔던 것은 아니었는데 미술관 입구에 커다랗게 놓인 작품을 보고 인터넷에서 봤던 RM의 사진이 딱 떠올랐다. 방탄소년단의 팬들로 미술관이 가득 차있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평일이어서 그랬는지 갤러리는 조용하고 차분했다.
<베이징에 부는 바람>이라는 타이틀로 중국 출신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었다. 두 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전시장에 발을 들이자마자 가장 먼저 나를 환영해준 것은 정체불명의 바람소리였다. 숨이 무척이나 가쁜 누군가의 들숨, 날숨 같은 소음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이 소리의 속도와 주기에 맞춰 덩달아 내 호흡도 가빠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전시장의 위층으로 올라가서야 이 소리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전시장 한쪽 벽면에서 상영 중인 영상작품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천페이 작가의 “꿀 No.1”이라는 제목의 작품이었다.
영상은 흰 바탕과 화면 중앙의 구멍 하나가 등장하면서 시작한다. 갤러리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부터 들려왔던 숨소리와 함께 구멍에서 빨갛고 끈적한 액체가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그 빨간 액체는 들숨과 날숨 소리에 맞춰 구멍에서 넘쳐흐를 듯 솟아올랐다가 다시 빨려 들어가기를 반복한다.
호흡은 깊어지고 빨간 액체는 조금씩 구멍을 넘쳐 밖으로 흘러나온다. 액체가 흘러내림과 동시에 그 구멍이 어떤 병의 입구였음을 알려주는 형태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호흡은 빨라졌다가 안정되었다가를 반복한다. 액체는 계속 조금씩 흘러넘치고, 어느 순간 호흡이 멈춤과 함께 빨간 액체는 무너져 내린다.
이 8분가량의 영상이 한 생명의 일대기를 담고 있는 것 같았다. 태어나서 첫 호흡을 내뱉는 순간부터 인생의 각종 희로애락을 지나 마지막 호흡을 내뱉는 순간까지가 이 쉽고도 어려운 영상에 담겨있었다. 사람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내뱉는 숨을 불과 두 달 반 전 직접 목격한 나였기에 영상에서 더더욱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영상 속 빨간 액체와 몇 번의 호흡을 같이 했는지 모르겠다. 한참의 시간이 흘러가도록 스크린 앞에서 발을 떼지 못했다.
갤러리를 빠져나오며 사람의 호흡이라는 게 얼마나 가벼운 것인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들이쉬고, 내쉬고. 이 단순한 행위에 우리의 생명줄이 달려있다. 엄마의 생명줄을 손에 쥐었을 때가 생각난다. 어쩌면 내 손으로 엄마를 놓은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의 생명줄은 내 손이 아니라 엄마의 호흡에 달려있었다. 죄책감이 한 호흡만큼 덜어진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