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이방인에게 위로받으며
파도에 젖은 신발을 말릴 테니까
2020.01.22.
며칠 전 우연히 “문학살롱 초고”라는 카페를 알게 되었다. 집에서도 그다지 멀지 않아서 언젠가 한 번쯤은 가봐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인스타그램을 팔로우해두었는데 오늘 마침 글쓰기 모임을 연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그 게시물을 보자마자 처음 든 생각, ‘아, 가고 싶다’
그런데 연달아 올라오는 생각들이 나를 방해했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데 괜찮을까? 소규모 모임이라 왠지 자주 오는 사람들만 모일 것 같은데 소외감을 느끼면 어쩌지? 글 엄청 잘 쓰시는 분들만 올 것 같아. 괜히 갔다가 비웃음거리만 되는 거 아냐? 무작위로 주제를 고르는 것 같던데 한 줄도 쓰지 못하면 또 어떡하지? 등등의 부정적인 생각들.
그래도 일단 가보자라는 생각으로 DM을 보냈고, 어느덧 모임 시간이 다가왔다. 걸어갈까 버스를 탈까 고민한다는 핑계로 미적대다가 결국 한 번에 가는 버스를 다 놓쳐버렸다. 이 짧은 거리를 5분 걷고, 3분 마을버스 타고, 2분 지하철 타고, 또 5분 걸어서 겨우 제시간에 도착했다. 어쩌면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는 부정적인 생각들이 계속 내 발목을 잡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겨우 도착한 “초고”는 커피보다 위스키가 더 어울리는 것 같은 공간이었다. 서두르느라 올라간 체온을 내리기 위해 겉옷을 벗으면서 메뉴판을 훑어봤다. 이곳에서만 파는 칵테일이 있는 것 같았다. “문학살롱”이라는 이름답게 칵테일에는 작품의 이름이 하나씩 붙어있었다. 그중에서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었다.
《이방인》은 작년에 완독한 책 중 유일한 소설이다. 작년 여름 엄마가 돌아가신 것을 계기로 죽음에 대한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던 때가 있었다. 평소 소설을 즐겨 읽지는 않는 편이었지만 그때 우연히 이 소설을 접하게 되었고, 이후 내 머릿속에 가장 강렬하게 각인된 책 중 하나로 남아있다.
칵테일 이방인은 메뉴판에 이렇게 소개되어 있다. “커피와 시가, 아니 시나몬.” 이방인과 커피, 시나몬, 그리고 이 공간의 색감과 칵테일의 도수까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자연스러웠다.
글을 쓰기 위해 모인 사람들과 함께 오늘의 글감이 될 문장을 골랐다. 서가에 꽂혀있는 아무 책의 아무 페이지 아홉 번째 문장인 오늘의 글감은 “파도에 젖은 신발을 말릴 테니까”였다. 빈 노트북 화면을 띄워놓고 생각했다.
파도,
파도에 젖은,
파도에 젖은 신발,
파도에 젖은 신발을 말릴 테니까.
그리고 떠오른 생각.
이방인.
엄마가 돌아가시고 죽음에 대한 책을 미친 듯이 읽었던 이유는 상실 이후에 따라오는 감정들이 버거웠기 때문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죄책감이었다. 있을 때 잘할 걸이라는 죄책감보다 나를 더 크게 괴롭힌 것은 어느 순간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는 내가 보일 때였다.
어떻게 엄마가 돌아가셨는데 웃을 수 있지?
어떻게 잠을 잘 수가 있지?
어떻게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떨 수가 있지?
어떻게 맛집을 찾아다니고,
어떻게 화장을 하고,
어떻게 여행을 다닐 수가 있지?
어떻게?
이런 생각들 때문에 《이방인》을 읽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게 《이방인》은 그런 책이었다. “어떻게?”라는 질문에 “그럴 수 있다”라고 대답해주는 책.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라는 질문은 파도처럼 꾸준히 나를 덮쳐온다. 파도가 휩쓸고 간 자리에는 잔뜩 젖어버린 내가 남아있다.
나는 오늘도 이방인에게 위로받으며 파도에 젖은 신발을 말린다. 그럴 수 있다고, 그럴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