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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정 Jan 28. 2020

저는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게 아닙니다

심심찮게 권력 있는 사람들의 자녀가 대학에 특혜 입학을 했다느니, 대기업에 부정채용이 됐다느니 하는 뉴스가 터져 나온다. 수많은 청년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연애며 결혼, 인간관계까지 포기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이런 뉴스는 당연히 반가울 리 없다. 그런데 나를 가장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이런 뉴스의 말미에 붙어 나오는 멘트이다. “이로 인해 열심히 살아가는 청년들이 상대적 박탈감에 빠져…”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표현이 계속 거슬린다. 사전에 상대적 박탈감을 검색해 봤더니 이런 결과가 나왔다.


“다른 대상과 비교하여 권리나 자격 등 당연히 자신에게 있어야 할 어떤 것을 빼앗긴 듯한 느낌. 자신은 실제로 잃은 것이 없지만, 다른 대상이 보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을 때, 상대적으로 자신이 무엇을 잃은 듯한 기분을 느끼는 것이다.” (출처: 고려대 한국어대사전)


만약 내가 누군가 부정으로 입학한 대학이나 특혜로 채용된 기업에 지원했다가 불합격을 통보받았더라면, 나는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것이다. 그 자리가 내 자리였을 수도 있는데 내 능력과는 관계없는 어떤 이유로 그 권리를 박탈당했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만약 해당 대학이나 기업이 나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면, 그때 내가 느끼는 기분 나쁨도 상대적 박탈감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나아가 모든 청년이 이 문제에 대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과연 옳을까? 지나친 일반화는 아닐까?



특권층의 누군가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자녀의 대학 입학이나 취업에 부정한 특혜를 주었다고 하자. 이런 경우 나와 같은 평범한 청년들은 화가 난다. 왜? 일부의 사람이 잘못된 방법으로 혜택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 잘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다. 내가 혹은 나와 같은 청년들이 이 문제에 화를 내는 이유가 “나는 갖지 못한 힘 있는 부모를 쟤는 가졌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절차가 공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가 나는 것이고, 이러한 부정이 여전히 묵인되고 있는 사회 시스템에 분노하는 것이다.


이건 상대적 박탈감과는 엄연히 다른 이야기다. 무언가를 빼앗겼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고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문제만을 보고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용어를 사용해가면서 청년들이 마치 “우리 부모님은 왜 국회의원이 아닌가”라며 부모를 탓하고 있는 것처럼 만들고 있는 일부 보도와 언사가 솔직히 매우 불편하고 언짢다.



한 단계 더 나아가자면 청년의 분노를 상대적 박탈감으로 치부해버리는 행태가 일종의 “꼬리 자르기”를 위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청년들이 느끼는 감정이 상대적 박탈감이라면 이런 부정을 저지른 당사자들을 엄벌하는 것만으로도 그 감정은 해소된다. 그들이 편취한 혜택을 도로 뺏음으로써 사람들이 느끼는 박탈감을 완화시키면 그만이라는 이야기다. 이것은 앞서 말했듯 꼬리 자르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부정이 일부 사람들의 일탈로 치부되어 버리면, 사회는 반성하고 달라져야 할 어떠한 이유도 필요도 없게 된다. 앞으로도 우리가 모르는 뒷거래가 이루어지고 같은 부정들도 계속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청년들의 목소리가 “우리의 박탈감을 해소시켜 주세요”가 아닌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잘못된 행태를 뿌리 뽑아 주세요”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에 대한 대응도 달라진다. 부정을 저지른 당사자에 대한 처벌은 물론이거니와 시스템을 재정비하는 것에까지 나아가기 마련이다.


수저론이 진리라고 받아들여지는 안타까운 세상이 되었다. 신분제도가 있는 것도 아닌데 청년들은 왜 수저론에 공감하고 호응할까. 그 이유는 부정 행각에 대한 특권층의 입장 표명 문구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번 일로 인해 박탈감을 느꼈을 청년들에게…”, “청년들의 박탈감 미처 헤아리지 못해…”


이 말은 다음의 문장들과 같은 말이다. “나처럼 권력을 가진 부모를 두지 못한 너희는 속상하겠지만 이게 현실이다”, “안타깝지만 너희가 내 자식이 아닌 걸 어떡하겠니”



청년들이 느끼는 감정은
상대적 박탈감이 아닙니다.
불공정에 대한 분노이고,
대답 없는 외침에 대한 허탈함입니다.


박탈감이 아니다. 청년들의 박탈감만 헤아렸다가는 사회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정당하고 공정한 세상을 만들어달라는 호소를 들어야 한다. 청년들이 느끼는 감정을 박탈감이라고만 규정짓고 계속해서 부정을 저지른 “특정인”만을 처벌하는 방식은 수저론을 더욱 강화시킬 뿐이다. 사회가 바뀌지 않는 한 “특정인”은 계속해서 생겨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도 부모 탓 좀 그만하고 싶다. 이대로 가다가는 청년들이 진짜 박탈감을 느끼는 세상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2020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다. 많은 정당이 청년들의 마음을 잡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우리나라의 정치가, 나아가서는 사회가, 청년들의 진짜 마음을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어떤 패배에 대해 흙수저를 물려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내 노력이 부족했음을 깔끔하게 인정할 수 있는 판을 깔아주었으면 좋겠다.


얼마 전 배우 김서형 씨가 한 토크쇼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한 걸음, 한 걸음 정상적으로 걸어온 사람들이 가장 먼저 정상에 도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정상이다.” 내 부모가 누구이든 아무 상관없이 모든 청년이 노력한 만큼 성취할 수 있는 정상적인 세상이 되길, 그 누구도 박탈감이나 불공정함을 느낄 필요가 없는 때가 오길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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