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열일곱 살 때 말이야. 진도에서 8,700원을 들고 서울에 왔어. 요즘이야 몇 시간이면 오지만 그때는 진도에서 서울 오려면 몇 날 며칠이 걸렸었다고. 집에서 돈 때문에 고등학교를 못 보내준다잖아. 그래서 돈 벌려고 서울에 왔지. 그때는 진도에 전기도 안 들어올 때였어. 아빠는 서울에 와서 전기라는 걸 처음 알았다니까. 아빠 군대 있을 때는 어땠는 줄 알아?”
아빠가 술에 취해 들어오면 매일 똑같이 읊어대는 레퍼토리다. (서울 올 때 들고 온 돈의 액수는 매번 달라지긴 한다.) 취한 아빠의 입에서 이 레퍼토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하면 나는 일단 귀를 닫았다. 아빠가 이 말을 할 때만큼은 전형적인 꼰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아오면서 너를 키워냈는데 효도는 둘째치고 너는 왜 네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고 있느냐고 나를 꾸짖는 것만 같았다.
커다란 사회는 물론이고 작디작은 우리 집 거실까지 가득 메워버린 세대 차이는 서로의 인생에 대한 존중이 없어서다. 어른들은 청년들을 보며 노오력이 부족하다고 혀를 끌끌 차고, 청년들은 어른들의 뒤통수에 대고 알아서 잘하고 있으니 신경 끄라며 문을 쾅 닫는다. 술김을 빌어 매번 똑같은 연설을 쏟아내는 아빠와 그 앞에서 딴생각을 하고 있는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로의 인생에 대한 존중이 없었다.
자식의 역할은 부모의 인생을 존중하는 것이다
무조건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하라는 말이 아니다. 부모 자식 관계를 떠나 사람 대 사람으로서 솔직하게 그들의 삶과 노력을 인정해주라는 이야기다.
누군가의 인생을 다만 몇 년이라도 책임졌다는 것은 존중받아 마땅한 일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아빠의 노후를 책임질 자신이 없다. 열심히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확신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부모님은 (일부 몰상식한, 부모라는 이름을 갖다 붙이기도 싫은 그런 사람들 말고), 어쨌든 자식이 성인이 될 때까지 그들을 감당해냈다. 이것만으로도 부모는 자식에게 존중받아 마땅하다.
아빠의 레퍼토리가 온통 고생한 이야기로 가득 차있었던 것은 그만큼 아빠가 사랑과 인정, 관심에 목말라있었다는 뜻이다. 나는 요즘 아빠의 “라떼는 말이야”를 존중하고 있다. 리액션 요정이 되어 아빠의 지난 인생에 열심히 맞장구를 쳐준다. 아빠가 집에서 요리를 한 번 하면 쌍엄지를 치켜세워 주고, 화장실 청소를 한 번 하면 오구오구하면서 엉덩이도 뚜드려준다. 아빠가 말씀하시길, 남자는 죽을 때까지 애라고 했다. 근데 이건 여자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누구나 존중받고 사랑받고 싶다. 아직 부모가 안 되어 봐서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부모라면 자식에게 가장 인정받고 싶지 않을까. 오늘은 아빠에게 어떤 칭찬을 해드릴지 고민해봐야겠다. 우리 아빠, 참 열심히 살아오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