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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정 Feb 08. 2020

매일 글은 쓰지만 일기는 쓰지 않습니다

일기를 쓰지 않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이 이유들에 대해서 주저리주저리 쓰다가 다 지웠다. 뭐 이렇게 솔직하지가 못한가 싶어서.


내가 일기를 쓰지 않는 이유는 딱 한 가지다. 일기장에서조차 자유롭게 글을 쓰지 못하는 내 모습이 너무 싫어서.


누군가 내 일기를 읽게 될까 봐 두려웠다. 나 이외의 독자가 존재하는 일기는 늘 솔직하지 못했다. 자꾸 문장을 꾸미려 들고 무의식 중에 기승전결의 흐름을 만들어냈다. 속마음도 당연히 담지 못했다. 그저 매일 일기를 쓰고 있다는 사실 하나로 자기 위로를 하곤 했다. 일기장에 담기는 내용보다, 사소한 일기까지도 이렇게나 유려한 문장으로 적어 내려가는 내 모습을 위해 일기를 썼던 것 같다. 일종의 자기만족이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후지던지.


작가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 뒤로 몇 번 일기 쓰기에 다시 도전했었던 적이 있다. 한참 호오포노포노에 빠져 있을 때는 매일 호오포노포노일기를 쓰기도 했고, 하루 일과를 되돌아보며 감사했던 일을 몇 가지 찾아 감사일기를 쓰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다 때려치웠다. 그 일기들조차 어느 순간 보여주기식 일기로 돌변해버렸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 어렸을 때부터 모아뒀던 일기장을 전부 버렸다. 문득 책장에 꽂힌 일기장들을 바라보는데, 저 일기들 중 진짜가 몇 퍼센트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진위 여부를 판가름할 수조차 없을 만큼 많은 시간이 지나버렸기에 다시 펼쳐볼 일도 없을 것 같았다. 덕분에 책장에 공간이 생겨서 좋았다. 어쩌면 굳이 일기장을 모아뒀던 것도 자기만족 혹은 보여주기식이 아니었나 싶다.


매일 글은 쓰겠지만 앞으로도 일기를 쓸 생각은 없다. 아니, 매일 쓰는 이 글들에 일기라는 타이틀을 붙일 생각이 없다는 게 더 맞는 말이겠다. 내 일상보다는 내 생각을 남기고 싶다. 오늘의 날씨보다는 오늘의 깨달음을, 오늘 만난 사람들보다는 그들과의 대화에서 느낀 점을, 오늘 먹은 음식보다는 그때의 기분을 남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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