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 - 스티븐 그린블랫
지도자들은 종종 위태로운 처지에 놓이고 타락한다.
군중들은 종종 어리석고, 배은망덕하며,
민중 선동가에게 쉽게 넘어가고,
그들의 진정한 이익이 어디에 있는지 더디게 이해한다.
p.246
위에 적은 문장에 우리가 폭군이 만들어내는 방법이 모두 들어있다.
나는 셰익스피어에 대해 1도 모르는 사람이다. 이름은 물론 알고 있다만 그 유명하다는 그의 몇 대 희극이니 비극이니 하는 작품을 단 한 편도 읽지 않았다. 배경지식이 전무한 상태에서 이 책을 읽으며 느낀 가장 큰 깨달음 하나는 독재자의 상당수가 교육이나 세뇌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사실이다.
리처드 3세의 경우 기형으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의 혐오와 동료의 조롱을 감내하며 살았다. 맥베스는 아내로부터 남자다움을 강요받는다. 코리올라누스의 경우 리처드 3세와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영향이 큰데, 차이가 있다면 코리올라누스는 어머니의 말이 전부인 인생을 살았다. 그는 어머니의 작품이었다.
“그가 받은 고통에 대한 보상 심리가 발동하여 독재자는 강요든 기만술이든 혹은 폭력이든 위협이든 언제 어디에서나 모든 사람의 의사를 강제하는 방법을 발견한다. 아무도 그를 따돌릴 수 없다” - p.91
이들은 어느 위태로운 순간 쌓아두었던 고통에 분노를 더해 강력한 독재자가 되었다.
“그들은 그가 민중에 우호적인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로마에 대한 그의 군복무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많은 평민이 그들 자신의 계급적 이익에 반하여 그에게 그들의 표, 즉 그들의 ‘목소리’를 줄 생각이었다.” -p.223
“당연한 일이지만, 이 보통 사람들은 어떤 이웃이 위험한 사상을 품고 있다는 게 의심이 되어도 그를 당국에 고발하는 것을 아주 꺼렸다” -p.15
독재자가 탄생하는 배경에는 어리석은 군중의 역할이 크다. 어쩌면 일부 사람들은 이것을 “인심” 혹은 “정”이라는 말로 포장하려 들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매한 인심 때문에 독재자가 탄생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함부로 누군가에게 목소리를 주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드라마에서 리처드의 즉위는 그 주변에 있는 인물들이 다양하게 공모에 가담함으로써 가능해진다. 그러나 극장에서는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우리 관중들이 아주 독특한 형태의 협력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p.113
“아주 괴상하게도 이 악당이 여러 세대의 배우, 연극 관람자, 독자들을 매혹해 왔다. 우리의 내부에 있는 뭔가가 그가 왕좌에 오르는 저 끔찍한 과정을 매 순간 즐기고 있는 것이다” -p.115
“그들이 남들보다 한 수 위의 술수를 보이고, 거세게 몰아치고 음모를 꾸미고 배신하면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과정을 지켜보는 동안 우리는 일종의 도덕적 휴가를 즐기게 된다” -p.119
독재자를 도와주는 사람은 언제나 있다. 그들은 주로 독재자를 도움으로서 자기에게 발생할 이익을 위해 독재자를 돕는다. 그런데 독재자가 권력을 잡는다 해도 아무런 이득이 없는 우리도 알게 모르게 그를 지지하고 응원하게 된다. 도덕적 휴가라는 말이 딱 맞다. 우리는 독재자에게서 일종의 호쾌함을 느낀다. 때문에 덕을 쌓은 온건한 군주보다 때로는 시원한 독재자에게 끌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선거 공약의 황당무계함은 그 약속의 실효성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케이드는 자신의 출신에 대하여 계속 거짓말을 하고, 그가 앞으로 이룩하게 될 위대한 업적을 미친 듯이 자랑한다. 군중은 그런 약속을 열렬히 받아들인다” -p.57
“만약 어떤 냉정한 구경꾼이 케이드의 황당한 사실 왜곡, 실수, 노골적인 거짓말 등을 낱낱이 지적한다면, 군중의 분노는 케이드가 아니라, 그것을 지적한 구경꾼에게 퍼부어질 것이다” -p58
케이드는 “영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고 약속한다(p.61)”.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으면서도 지지한다. 독재자는 군중의 적개심, 열등감, 열패감 등을 적절히 조종할 줄 안다. 특히나 교육받은 자들, 엘리트 집단에 대한 적대심을 교묘히 활용한다. 군중은 그런 독재자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다.
“요크는 이렇게 선언한다. “나의 측면에서 보면 진실은 너무나 뚜렷하게 보인다. 너무 분명하고, 너무 명백하고, 너무 환하게 빛나고 있어서, 눈먼 사람조차도 그 빛을 볼 수 있을 정도이다.” 이런 강한 주장은 중간에 있는 회색 지대를 인정하지 않으며, 합리적인 사람들이라면 서로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거부한다” -p.40
“이제 구경꾼들은 처음 의도했던 것처럼 중립의 상태로 남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그들은 선택해야만 했다” -p.41
“당파 전쟁은 냉소적으로 계급 전쟁을 활용한다. 그 목적은 혼란을 만들어내자는 것인데, 독재자는 그 틈을 이용하여 권력을 잡는 것이다” -p.50
정치의 세계에는 무조건적인 옳고 그름이 존재하기 어렵다. 이것만 알고 있어도 흑백논리가 정치나 통치 수단으로 이용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우칠 수 있다. 정답은 주로 회색 지대 어딘가에 있다. 독재자들은 정답이 담긴 회색 지대 위에 카펫을 깔고 앉아, 마치 자기가 정답인 양 진짜 정답을 숨겨버린다.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현명한 군중이라면, 이분법적 사고를 버려야 한다. 완벽하게 옳은 것도, 완벽하게 틀린 것도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셰익스피어의 생각에,
집단적 올바름을 회복하는 가장 좋은 기회는
보통 시민들의 정치적 행동에서 나온다.
p.247
지금은 광대만이 알고 있는 것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리어왕의 시대가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드라마들처럼 하고 싶은 말을 굳이 돌려서 말해야 하는 때도 아니다. 독재자를 만들어내는 것은 군중이다. 그리고 독재자의 탄생을 막을 수 있는 것도 군중이다. 보통 시민들의 정치적 행동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다. 2020년 총선을 앞두고 나를, 그리고 우리를 되돌아볼 수 있어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