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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대장 Nov 20. 2024

종이가 아닌 아이의 마음에 먼저 채워 넣어야 해요

경험만으로는 안됩니다.

지인의 건너 건너 학부모에게서 전화가 온 건 며칠 전이다. 이번 달부터 본격적으로 아이들을 대상으로 글쓰기 수업을 시작했다. 주중 3일을  편성해 70분 동안 소수의 정원으로만 운영한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읽고 쓰는 시간을 제공하기 시작한 건 작년, 그러니까 23년 2월 책벗뜰을 오픈했을 때다. 딸아이와 친구를 상대로 집에서 하던 필사 수업을 책벗뜰로 옮겨와 진행 한 것이다. 두 명이었던 아이들이 셋이 되고 곧이어 넷이 되었다. 이제 막 학교에 들어선 아이들은 그림 그리듯 글자를 쓰며 그렇게 '쓰기'의 재미에 빠져들었다.


재능기부 차원으로 1여 년 동안 필사수업을 이었다. 처음에는 50자 내외에도 팔이 아프다고 징징대던 아이들이 어느새 300자 정도는 쉬지 않고 거뜬히 쓸 수 있게 되었다. 갓 한글을 읽기 시작한 아이들은 주중 1시간이라도 함께 모여 활자를 써내리며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 속에서 한글을 좀 더 친숙하게 느꼈을 것이다.


2학년이 되면서 단순하게 따라만 쓰던 필사에서 글쓰기로 경로를 변경했다. 딸아이 같은 경우는 유치원생일 때부터 일기 형식의 단순한 글을 쓰기 시작했고, 동시 쓰기 같은 경우는 수시로 끄적이던 아이였다. 글을 잘 쓰게 해줘야겠다는 마음이 아닌 그저 '쓰기만 하면 되는' 시간을 확보해 주자는 심산에서 시작한 게 말마따나 글쓰기 수업이 된 것이다. 입소문이 나면서 측근들의 자녀들이 한 명, 두 명 더 모여 총 여섯 명의 아이들과 매주 금요일 1시간 동안 글을 쓰고, 발표를 하고, 시간이 남으면 책을 읽으며 읽고 쓰는 공간인 책벗뜰에서의 시간을 즐겼다.


여기저기에서 '우리 아이도'라고 입을 떼며 문의 해오는 분들이 늘었다. 어떤 아이라도 상관없기에 시간이 되면 보내달라 이야기하면서도 늘 끝에는 "그런데 이거는 알고 계셔야 해요. 여기는 논술학원은 아니라서 어머님이 생각하고 바라는 부분들이 저와 다를 수 있습니다.  쓰는 시간과 쓸 기회를 제공한다는 개념이고 쓰기 싫다거나 시간을 제대로 활용하지 않는 아이들에게는 불필요한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잘' 쓰게 해주고 싶어 보내시는 거라면 다른 학원을 알아보시면 되고요. 무료로 운영되는 만큼 아이의 자율성에 의해 진행되고 있으니 숙고하고 보내주세요."라는 말을 꼭 붙였다.


아이들의 글은 어른들의 글과는 다르고 특히나 저학년 친구들의 글은 어른의 잣대로 잘 썼다, 못썼다를 평가하고 가려내는 것에 개인적인 불편함이 있다. 물론 육안으로 그럴싸해 보이는 글도 많다. 그렇게 유려한 문장을 구현해 스스로도 '나 글 좀 쓰지?'라는 표정으로 종이를 내미는 아이들의 특징은 글을 쓰는 것 자체의 '즐거움'을 찾기가 어렵다. 잘 써야 한다는 생각에 온갖 작문 이론을 다 끌어다 정형화된 문맥과 표현으로 글을 완성했지만 그 친구들의 글은 울림이나 재미, 감동이 적었다. 그냥 '잘'쓴 글일 뿐이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창의성과 개별성, 표현력과 지구력이 균등하게 필요한 작업이다. 그것에서 아이들이 쓰는 글은 단순한 잣대로 평가해서는 곤란하다. 두어 줄의 문장일 뿐이라도 아이가 담으려 했던 의미가 얼마큼 잘 보이느냐로 글을 읽으면 마냥 유려하게 써내린 글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동'과 '감격'이 있다.


감동과 감격이 있는 글은 일반적인 시선에서는 다소 어눌하고 하찮아 보일 수 있다. 좀 더 다양한 표현, 유연한 문장 연결, 감정과 생각이 담뿍 묻어나는 글. 그래 그런 글들은 누가 봐도 보기 좋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글을 쓰기까지의 과정에서 필요한 것들이 부모님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꽤 복잡하고 까다롭다. 아이의 마음과 몸에, 그 가슴과 상상의 상자 속이 비었는데 그 속에서 뭔가를 꺼내야 하는 것이 글쓰기니 빈 채로 이 곳에 온 아이들은 글쓰기가 버거울 수 밖에 없다. 다양한 경험도 좋고 책도 좋다. 그런데 가장 좋은 건 아이의 생각을 물어봐 주고, 대상이나 현상에 대해 생각을 할 시간을 제공해 주고, 그것을 이야기 나누며 어른의 어휘와 시선을 풍부하게 전달해 주는 작업들이 더더욱 중요하다.


책을 많이 읽는 아이가 글을 잘 쓴다? 물론 책을 안 읽는 아이보다는 더 많은 대리 경험 및 감정을 느끼고 배울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혼자만 겪고 느끼다 보면 해석되지 않거나 가로막히는 지점들에서 그 이상 나아갈 수 없다. 그래서 혼자 책을 읽는 것보다 함께 읽고 토론을 하거나 (거창하게 토론까지도 아니고, 대화나 의견 나눔만으로도 충분하다) 상대의 생각과 내 생각을 비교 또는 공감해 보는 시간이 가지는 것이 사실 더 의미 있고 중요하다.


5학년인 아이에게 이제는 정말 글쓰기가 필요한 것 같아 연락해 오셨다는 학부모와 30분가량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기, 딱 제가 찾던 곳이에요." 잘 쓰게 하려면 기술을 가르쳐 주고 진지하게 첨삭 및 지도를 해주는 논술학원을 찾아가시라는 조언에 이미 3학년 때 논술학원을 다녔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곳에서 이미 힘과 진을 뺀 아이지만 중학생이 되기 전 글쓰기를 꼭 연습시키고 싶다는 학부모는 수행평가 준비의 일환으로 아이의 글쓰기를 염두에 두고 계셨다. 아이의 능력이 학습과 연결되는 것들에 불편하다기보다 목적이나 방향의 끝이 결국 '성적'이라는 데에 다소 아쉬운 마음도 들었지만 당장 내가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수행평가의 성적이 아닌 글을 쓰는 것 자체라는 생각으로 학부모와 상담을 마무리했다.


글을 잘 쓰고 계속 쓰고 싶어 하는 친구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정말 일상적이고 작고 작은 일들에서 많은 의미와 서사를 부여한다. 일기에 써야 하는 날씨에도 '꾸준히 연습한 것들이 날아가 버린 날씨'라는 표현을 하는 친구는 구구단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속상한 마음을 날씨로 표현해 한 줄의 문구에도 충분히 진심을 부어 넣었다. 글쓰기를 힘들어하고, "할 말이 없어요"라고 말하는 친구들의 공통점도 물론 있다. 지켜보건대 일상이 한정적이라는 것이다. 해외여행을 가도, 캠핑을 가도, 새로 생긴 맛집에 갔어도 아이가 그걸 체화시키거나, 그 경험에서 배우고 느낀 것들이 부재하니 그것을 말로 옮기는 것이 편안할 리 없다.


경주 월드에 간 건 이야기할 수 있지만 경주 월드에서 경험하고 느낀 것을 한 번 더 정리하거나 이야기 나눈 경험이 부족하면 그것에 대한 글을 쓰기가 어렵다. 그것은 글쓰기를 가르치는 내가 해줘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경주 월드는 왜 간 거야? 가는 동안 재미있는 일 없었어? 그 놀이 기구를 왜 가장 먼저 고른 거야? 입장권이 얼마인지 혹시 알고 있니? 놀이 기구 타는 동안 부모님은 뭘 하고 계셨어? 경주 월드 안에서 먹었던 것 중에 가장 맛있었던 건 뭐야?"하지만 가장 좋은 건 그 경험을 공유한 사람들과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그 경험에 대한 '생각'을 꼭 한 번 정리하고 기억해 놓는 작업을 가족들과 함께해 주는 밑 작업들이 필요하다.


하얀 종이는 하얗기에 편안하지만 또 하얗기만 해서 부담스럽고 불편하기도 하다. 그때의 경험에 대한 자신만의 생각과 해석을 많이 가진 아이는 하얀 종이를 편안해 한다. 생각과 해석이나 느낌, 배운 점이 없는 아이들에게는 하얀 종이는 짐이고 부담이다. 아이들이 글을 '잘' 쓰길 원한다면 꼭 한 번 생각해 보셔야 한다. "지난주에 갔다 온 캠핑장 이야기 써!" 아이가 캠핑장에서 무엇을 느끼고, 배우고, 생각하고, 몸소 겪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으면서 그것을 쓰라고 말하고 있다면 지금 이 순간부터는 생각을 바꿔보기를 바란다.


"너 아까 물속에서 노는 거 보니까 진짜 물고기 같았어! 근데 엄마가 궁금해서 그러는데 숨은 안 찼어? 혹시 정말 물고기처럼 물속에서 숨 쉰 건 아니지?"


아이는 자신이 물속에서 경험하고 느낀 것을 나의 질문으로 떠올려보기 시작할 것이다. 숨이 찼던 경험이 그제야 실감으로 다가와 기억으로 저장될 것이고, 덤으로 물고기가 물에서 숨을 쉴 수 있는 이유나 방법이 궁금해질 것이다.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아이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눠보길 바란다. 그렇게 많은 이야길 나눈 아이들이 한 주가 지나 여기로 오면 빠르게 굴러가는 연필 소리에 나는 단박에 알아차릴 것이다. 글 속에 담길 아이의 예쁜 생각들이 전보다 더 환희 반짝일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미지 <세 친구의 즐거운 나들이 - 헬메 하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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