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밤, 기린의 말

사월의 미 칠월의 솔 -김연수

by 책사이애


깊은 밤, 기린의 말

우리 머리 위에는 거대한 귀 같은 게 있을거야. 그래서 아무리 하찮고 사소한 말이라도 우리가 하는 말들을 그 귀는 다 들어 줄거야. 그렇다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맺어 주거나 내 안에 가득한 슬픔을 없애 준다는 뜻은 아니니 아무짝에도 소용 없는, 그저 크고 크기만한 귀라고 말할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런 귀가 있어 깊은 밤 우리가 저마다 혼자서 중얼거리는 말들은 외롭지도 슬프지도 않은 거야. 5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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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사랑한다고 큰 소리로 말해도 들을 수 없는 아들은

눈이 보이지 않는 말티즈, 기린을 첫 눈에 보자 마자 사랑하게 되었다.

말하지 못하는, 말을 알아 듣지도 못하는 아들을 차에 태우고

생의 마지막 도로를 질주하려던 엄마는 아들이 좋아하는 프라이드 치킨을 먹고 나서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죽고 싶다 노래를 부르던 엄마의 푸념이 어느새 무덤덤해졌고

그런 동생이 엄마 아빠보다 더 중요한 쌍둥이 자매는

기린이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고나서 다시 분양소로 보낸 아빠를 원망하며

깊은 밤, 어둠으로 어디가 어딘지 분간할 수 없는 골목을 찾아 찾아

기린의 앞에 선다. 아니, 섰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자, 기린이 입을 움직였다. 낑낑거리는 그 소리는 우리 귀에 들렸다. 유리창이 두꺼워 그럴 리가 없었지만, 우리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67p

보이지 않아도, 들리지 않아도,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다 알 수 있는 것. 기린의 말이다.

#기획독서 #한컵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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