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게 한 문장

언젠가의 나 그리고 언젠가의 모두

by 책사이애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딸아이를 2016년에 출산했다. 2016년은 대한민국 역사에 있어 꽤 중요한 이슈가 많았던 해다. 역대 초저출산율을 기록한 해인 동시에 ‘국정 농단’이라는 희대의 사건이 일어나 나라가 들썩거렸다. 최초로 범국민적 촛불집회가 시작되었고(이전에도 있었겠지만 지금과 같은 고유성의 띤 촛불 집회는 처음)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하야되는 과정을 실시간 속보로 지켜보았다. 조리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어디서나 왕왕거리던 티브이 뉴스 소리가 들리지 않아 안도했던 장면이 떠오른다. 첫 출산의 복잡다단한 심정과 온 나라가 붕괴될 것만 같은 불안함, 몽매한 여성 지도자의 말도 안 되는 행태에 울분이 차올라 그 시기 마음이 크게 불편했다.


아이가 조금 자라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다. 두 돌 까지는 오로지 아이한테만 집중했기에 국정 농단의 결과나 새로운 대통령의 선출, BTS의 빅 히트도 유의미하게 인식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아이가 혼자서 밥을 먹을 수 있을까? 언제쯤이면 재워주지 않아도 그냥 잘 수 있을까? 오늘 하루는 아이와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나, 따위로 온 하루를 채웠던 시기다. 그나마 두 돌이 조금 안 됐을 때부터 본격적으로 도서관을 드나들 수 있었기에 차츰 내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만난 책이 한강 작가의 <작별>이 실린 김유정 문학상 수상 작품집이다. 한강 작가는 익히 알고 있었다. <채식주의자> 소설이 맨부커상을 수상했고, 책의 내용이 파격적이라 연일 이슈화되었기 때문이다. 언제고 슬쩍 펼쳐든 적이 있긴 하지만 당시 소설 내용에 집중하기가 어려워 금세 덮고는 ‘수상작은 역시 어렵군’ 속으로 생각했다. 그럼에도 어려운 소설을 쓰는 작가의 책을 다시 고른 건 순전히 제목 때문이다.


그렇게 읽게 된 단편 소설 <작별>은 아직도 어렴풋하게 기억이 난다. 눈사람이 된 여성이 등장했고, 눈을 묘사하는 작가의 문장들이 좋아 흠씬 놀랐던 기억이 명징하게 남아 있다. 채식주의자를 덮었던 마음이 아쉬운 동시에 그녀의 글을 모두 다 읽고 싶다는 욕심도 일었다. 그 시기 우연한 단편 소설 한 편 덕분에 다시금 나의 독서욕이 꿈틀댔다. <똑게육아>와 같이 정통 육아서만 내내 파고들었는데 하나 둘 소설책을 빌려오게 되었다. 당시 읽었던 소설들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이 나는 건 그 책을 읽는 동안의 내가 소설에 간절했기 때문일 것이다.


작년, 한강 작가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힘든 시절의 나를 일으켜 주었던 그녀라 수상 소식에 누구보다 기뻤다. 그해 책벗들과 삼삼오오 모여 한강 소설의 대표작들을 읽었다. 몇 권의 소설만으로도 충분한 감동을 주는 작가였고, 어려웠지만 어려웠던 만큼 진하게 남는 소설들이었다. 그녀 작품의 세계관이나 작가에 대한 경이로움이 가득 들어찬 가슴에 노벨문학상 수상은 내 가슴속에서 거대한 도끼가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그녀의 글이 어떻게 내 인생을 바꾸어 줄지. 얼마 안 가 수상 연설문을 듣는 순간 거대한 도끼가 쩍, 나를 갈라주었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무력하고 연약한 내가 저 문장 하나로 갑옷을 입었다. 갑옷뿐이랴, 투구도 쓰고, 긴 창도 얻었다. 지금의 내가 언젠가의 나를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니 전에 없는 전투력이 샘솟았다. 쓰러져 있는 과(거의 현) 옥이를 도울 수 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과옥이를 도우러 갈 것이다! 내가 구할 수 있다! 구할 것이다!


피 흘리며 아스러져가는 생명들을 보며 무서워 도망가기 바빴던 내가 저 문장 하나로 용기를 얻었다. 도울 것이다, 구할 것이다, 현재의 내가, 지금 할 것이다. 그렇게 과거와 죽은 자를 도울 수 있는 방법들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작게나마 하나씩 도울 수 있는 일을 시작한 건 물론이고, 두려움에 회피하기 바빴던 내가 기꺼이 그것들과 마주 서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마주 선 현(재의 현) 옥이에게 창과 갑옷이 있으니, 팔딱이는 심장이 있으니 그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앞으로의 내 삶 속 모든 순간은 저 문장으로 시작되고 끝날 것이다.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의 현(재의 현) 옥이는 더 많은 과거를 도울 것이고, 죽은 자를 더 많이 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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