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시간

제주에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by 박현

사람들은 여행자로 제주에 왔다 간다. 그러다가 한달살기도 하고 일 년을 살기도 한다.

나는 수없이 제주에 왔다 갔지만 제주는 한낱 바람 부는 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에 제주가 나를 품어 주었다. 그 순간부터 제주를 그리워했고 모든 것을 그대로 두고 그때 그 마음만 가지고 제주로 왔다.


제주의 시간이 전란과 유배의 시간을 창작의 혼으로 바꾸어 주다.


자구리 해변에 가면 이중섭의 서귀포 생활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야자수와 섶섬이 보이는 풍경이 좋기도 하고 아이들과 함께 바닷가에서 게를 잡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 평범한 그의 일상이 그려지기 때문이다. 전란 중 서귀포에 머물렀던 1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에 그는 대표작인 황소 연작을 구상했는지도 모른다.


추사 김정희에게 서귀포 유배의 시간은 어땠을까?

제주의 바람과 햇빛이 그의 외롭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시원하고 따뜻하게 바꿔주지는 않았을까? 그가 좋아했던 수선화처럼 설레는 순간이 있었으리라. 8년이라는 긴 유배의 시간에 그는 추사체를 완성하고 세한도를 그렸다.


예술가에게 시간과 공간이 창작의 두 가지 축이라면, 시간은 의식을 변화시키고 공간은 무한한 소재를 제공해 준다고 한다. 두 예술가는 제주라는 공간에 머물면서 전란과 유배의 시간을 불꽃같은 창작의 혼으로 바꾸어 놓았다.


나를 품어준 제주, 그리고 다시 마주한 제주의 시간이 단단하게 빛난다.


내가 처음으로 제주를 마주한 것은 조천읍 송당리의 한 게스트하우스였다. 나는 혼자서 단 하루의 짧은 여행을 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머물렀던 시간은 아직도 생생하다. 마흔을 넘어서면서 삶의 무게가 느껴지기 시작할 즈음, 몸도 마음도 처지고 버거워하는 나를 제주는 온전히 받아 주었다.


바람은 햇살을 머금고 성긴 비를 뿌리기도 했고, 푸른 밤하늘은 총총하게 빛나는 별무리를 흔들었지.

자정이 넘어 오름에 올라 보았던 깜깜한 밤하늘 별과 걷고 또 걸었던 곶자왈 숲길에서 위로를 받다니.

스스로를 다독이며 애써 살아온 것과는 또 다른 삶이었다. 나는 그 후로 표선 가시리, 안덕 대평리, 남원 하례리를 여행하면서 제주의 시간 속으로 빠져 들었다.


제주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제주에 산다는 것은 제주라는 지리적 공간에서 머무는 것뿐만은 아니다. 제주는 나를 포용하고 너그럽게 안아준다. 숨어 있는 감성을 일깨워 주고 오래된 상처를 덮어 준다. 누구라도 제주의 마음에 닿으면 제주는 순간이라는 시간의 열매를 선물해 준다. 제주의 시간은 그렇게 단단하게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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