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랏빛 영혼을 담다
구두미 포구로 가는 길에 멀구슬나무가 보랏빛 꽃을 피웠다.
요즘 서귀포 시내를 다니다 보면 멀구슬나무가 곳곳에 보인다. 서귀진 터에도 오래된 멀구슬나무 몇 그루가 서 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나무를 보았을 때 잎을 다 떨구고 가지에 알알이 매달려 있는 누런빛 열매가 뭔가 다른 느낌이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흠뻑 보랏빛 꽃을 피워낼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모쿠실낭‘이라고 부르는 나무는 마치 영혼을 담고 있는 모습이다.
제주 사람들은 멀구슬나무를 '모쿠실낭'이라고 부른다.
처음 제주의 향토 문학을 접하면서 ‘모쿠실낭’이라는 단어가 너무 낯설었다. 나무가 제주어로 ‘낭‘인 것은 알았지만 무슨 나무인 줄 몰랐다. 마을 입구에 ‘폭낭’이라 부르는 팽나무가 있다면, ‘모쿠실낭’은 집 골목마다 한 그루씩 심었을 정도로 제주 사람들에게는 친숙한 나무인 것 같다. 제주 사람들은 '모쿠실낭' 한 그루를 마음속에 품고 사는 것 같다.
멀구슬나무는 낙엽교목으로 분류된다. 키가 크고 잎이 지는 나무라는 말인데, 어느 정도 키가 자라면 더 이상 위로 뻗지 않고 옆으로 가지가 뻗어나간다. 그것도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 뻗어나간다. 대단한 절제로 스스로 아름다운 나무의 모양을 갖추는 것이다. 잎이 지고 나면 나무는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 텅 빈 가지가 직선으로 곧아 푸른 하늘을 향한다.
오월의 나무 ‘모쿠실낭’이 보랏빛 꽃을 피우고 버티고 서 있다.
멀구슬나무는 가을부터 겨울까지 누런빛 열매를 매달고 봄에 보랏빛 꽃을 피운다. 누런빛과 보랏빛은 서로 강한 대비를 만들어 내는 색이다. 마치 나무의 본래 고향인 인도의 어느 시골 마을을 연상하게 한다. 멀구슬나무의 여름은 어떨까? 여름에는 무성한 잎으로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줄 것이고, 그 풍성한 나무에 새들이 날아오를 것이다.
‘모쿠실낭‘은 동백나무처럼 흔한 나무였지만 감귤 재배가 시작되면서 많이 사라졌다고 한다.
포구로 가는 길목에는 아직 멀구슬나무가 버티고 서 있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오래전에 심어져 지금까지 꽃을 피우는 고목이다. 마을을 산책하면서 혹시나 지나칠 것 같아 자꾸만 주위를 살펴보게 된다. 귤밭 모퉁이에 베어진 나무 밑동을 쳐다보며 잠시 보랏빛 몽상에 빠져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