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시 읽기(19) 허수경의 시
'21세기전망' 동인들의 시집이 나오면 가장 먼저 서점으로 달려가 시집을 샀다.
문지, 창비, 세계사에서 출간된 시집들이 쌓였고 지금도 그 시집을 읽으면서 내 젊은 날을 반추하곤 한다. 그중에서도 문지에서 나온 허수경의 『혼자 가는 먼 집』(1992년)은 오래도록 내 곁에 남아있는 시집이다.
허수경의 시를 읽으면서 나는 어떤 생각보다 어느 말에 집중하게 된다.
시의 언어가 시 전체를 이끌어 가는 느낌이다. 표제작인 「혼자 가는 먼 집」은 "당신"과 "킥킥"이라는 두 개의 단어가 이끌어간다. 그것은 세월, 사랑, 상처 같은 것이나 순수 그 자체인 아름다움에 착 달라붙어 있다. 시인은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이라는 문장을 통해 인간이 품을 수 있는 희망조차도 여지없이 빼앗는다. 그것은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이다.
시인의 다른 시 「불취불귀」는 상처받은 마음이 기억하는대로 쓴 시다.
불취불귀(不醉不歸)를 직역하면 "취하지 않고 돌아가지 않는다"는 말이다. 시의 중간 부분에 나오는 "꿈꾸듯 살고 취해서 죽는다"라는 뜻의 몽생취사(夢生醉死)와 대비된다. 이 시에서도 "마음"이라는 단어가 시 전체를 흔든다. 마음이 시의 화자가 된 듯하다. "더 이상 안녕하기를 원하지도 않았으나 더 이상 안녕하지도 않았다"라는 문장으로 극단적인 허무의 정서를 표현해 낸다. 그것은 "갈 수도 올 수도 없는 길"이다.
허수경의 시를 읽으면 마음이 시를 쓴 것 같다.
시를 읽으면서 마음이 같이 가 주지 않으면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 오기를 되풀이한다. 시인은 몸의 모든 지체, 손과 발과 머리조차 묶어 둔 채로 마음으로만 시를 쓰지 않았을까. 다시 돌아가지 않기 위해 마음의 길을 따라 걷는 법을 배워야겠다.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
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
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킥
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
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
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 허수경의 시「혼자 가는 먼 집」전문
어느 해 봄 그늘 술자리였던가
그때 햇살이 쏟아졌던가
와르르 무너지며 햇살 아래 헝클어져 있었던가 아닌가
다만 마음을 놓아 보낸 기억은 없다
마음들끼리는 서로 마주 보았던가 아니었는가
팔 없이 안을 수 있는 것이 있어
너를 안았던가
너는 경계 없는 봄 그늘이었는가
마음은 길을 잃고
저 혼자
몽생취사(夢生醉死)하길 바랐으나
가는 것이 문제였던가, 그래서
갔던 길마저 헝클어뜨리며 왔는가 마음아
나 마음을 보내지 않았다
더는 취하지 않아
갈 수도 올 수도 없는 길이
날 묶어
더 이상 안녕하기를 원하지도 않았으나
더 이상 안녕하지도 않았다
봄 그늘 아래 얼굴을 묻고
나 울었던가
울기를 그만두고 다시 걸었던가
나 마음을 놓아 보낸 기억만 없다
- 허수경의 시 「불취불귀(不醉不歸)」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