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시 읽기(11) 엘리엇의 황무지
엘리엇의 「황무지」는 나에게 특별하다.
습작기에 무거운 말의 장벽에 부딪혀 한동안 시를 쓰지 못했다. 그때 황무지를 읽으면서 나는 비로소 은유와 상징의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언어는 가벼워도 된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1922년 발표된「황무지」는 434행으로 구성된 긴 시다.
보통은 모더니즘의 대표시로 회자되며, 이미지즘의 시로 소개되기도 한다. 나는 황무지는 한 편의 연극 같은 시, 희곡처럼 읽어도 좋은 시라고 말하고 싶다. 엘리엇은 주석에서 다양한 목소리가 혼재하는 “연극적인 독백의 구조”를 지향했다고 밝혔는데, 극작가이기도 했던 그는「황무지」에서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표현해 낸다. 「황무지」는 자유로운 형식과 탄탄한 구성을 기본으로 고전과 현대문학을 아우르는 텍스트에서 차용한 에피소드를 삽입하고 다양한 등장인물을 통해 과감한 풍자와 예언자적 목소리를 전달한다. 「황무지」를 읽으면 시로 여행을 떠나는 듯한 느낌이 드는 이유가 아닐까.
총 5부로 구성된「황무지」는 황폐, 파괴, 단절, 상실, 타락, 소멸의 이미지가 정화, 재생, 회복, 부활의 이미지로 전이되는 과정을 파편화된 언어와 현실화된 이미지로 구현해 나간다. 황무지의 어느 한 줄을 읽어도 전체를 읽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물론,「황무지」는 읽기 위해서는 다양한 주석을 참고해야 하는 수고가 필요하고 몇 가지 지식도 갖추면 좋겠다. 여기에다 시적 상상력을 더한다면 「황무지」가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 줄 것으로 믿는다.
첫 번째 단락은 시의 도입부에 해당한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로 시작하는 첫마디는「황무지」라는 시의 제목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읽을수록 멋진 서사라는 생각이 든다. 엘리엇에게 봄은 잔인한 계절이고 겨울은 망각의 계절이다. 「황무지」는 봄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겨울은 잔인한 봄의 앞에 있다. 시 속에 등장하는 단어들은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그것은 「황무지」가 만들어 내는 대단한 힘이다. 사월, 라일락, 기억, 욕망, 잠든 뿌리, 봄비로 이어지는 명사는 키우다, 섞다, 흔들다라는 동사로 이어지면서 역동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두 번째 단락에서는 마리의 목소리로 과거의 기억과 추억을 이야기한다. 마치 프루스트 소설을 읽는 것 같다. 엘리엇에게 여름은 기억의 계절이었던 것 같다. 시인은 자신의 추억 속에서 여름을 기억해 낸다. 시 속에 등장하는 지명은 독일의 뭰헨 근방의 호수와 공원이다. 그곳에서의 추억은 마리의 목소리를 통해 중의적인 언어로 다시 살아난다. 이어서, 예언자의 목소리로 황무지 같은 세상과 삶의 가치를 이야기한다. 마지막 문장 "나는 너에게 한 줌의 먼지 속에 있는 공포를 보여주리라"에서 엘리엇은 단순히 우울과 불안을 뛰어넘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극한의 감정인 공포심을 통해 지금의 불안정한 상태를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엘리엇은 조각난 삽화를 의도적으로 넣기도 하는데 바그너의 오페라『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이졸데가 죽은 후 바다를 향해 외치는 트리스탄의 대사 '황량하고 공허한 바다'와 그리스 신화의 '히아신스(아폴론이 사랑한 청년 히아킨토스가 죽은 후 핀 꽃) 에피소드'가 그것이다.
세 번째 단락에서 “소소스트리스 부인”이 등장한다. 고대 타로의 상징들과 현대 사회를 중첩시키며 마지막 정신적 보루이어야 할 종교적 타락에 대해 비판한다.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원형으로 돌고 있는 것이 보여요"라는 문장에서는 카프카의 문장을 보는 것 같다.
네 번째 단락에서 엘리엇은 현대도시의 상징이기도 한 런던을 "비현실의 도시"로 묘사한다.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이라는 산문시와 단테의『신곡』을 인용한다. "겨울 새벽 갈색 안개 아래, 수많은 군중이 런던 브리지를 건넜다"로 시작하는 문장은 킹 윌리엄 거리를 따라 세인트 메리 울노스 교회로 향한다.
마지막 단락에서는 셰익스피어 『햄릿』에서 오필리아가 미쳐서 부르는 대사 "굿 나잇"을 반복하며 죽음과 위선으로 재생 불가능한 현실을 격렬하게 내뱉는다.
엘리엇의 시 「황무지」 1부 죽은 자의 매장 편을 읽어 보았다.
국내 번역 시집이 있지만 단어와 문장만으로는 이해하기 쉽지 않다. 원문과 대조해 가면서 주석도 읽어야 하기에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현대사회의 황폐함이라는 메아리로 긴 여정을 떠난 덕분에 즐겁게 시를 읽을 수 있었다. 한 편의 연극 같은 시! 황무지는 나에게 그런 시집이다.
April is the cruellest month, breeding
Lilacs out of the dead land, mixing
Memory and desire, stirring
Dull roots with spring rain.
Winter kept us warm, covering
Earth in forgetful snow, feeding
A little life with dried tubers.
Summer surprised us, coming over the Starnbergersee
With a shower of rain; we stopped in the colonnade,
And went on in sunlight, into the Hofgarten,
And drank coffee, and talked for an hour.
Bin gar keine Russin, stamm’ aus Litauen, echt deutsch.
And when we were children, staying at the archduke’s,
My cousin’s, he took me out on a sled,
And I was frightened. He said, Marie,
Marie, hold on tight. And down we went.
In the mountains, there you feel free.
I read, much of the night, and go south in the winter.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으며
봄비로 무딘 뿌리를 흔든다.
겨울은 우리를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망각의 눈으로 땅을 덮고,
말라비틀어진 뿌리로 조금씩 생명을 먹여 살렸다.
여름은 우리를 놀라게 했다.
슈타른베르크 호수를 건너
소나기를 몰고 왔다.
우리는 회랑 아래 멈추었다가
햇빛 속을 걸어 호프가르텐으로 들어갔고,
커피를 마시며 한 시간쯤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러시아 사람이 아니에요.
리투아니아 출신이고, 진짜 독일인이에요.
어린 시절, 대공의 별장에 머물던 날들—
사촌이 나를 썰매 타러 데리고 나갔죠.
나는 겁이 났어요. 그가 말했어요:
“마리, 마리야, 꽉 잡아!”
그리고 우리는 미끄러지듯 내려갔죠.
산속에서는, 그제야 비로소 자유를 느껴요.
나는 밤늦게까지 책을 읽고,
겨울이 오면 남쪽으로 떠나요.
- 엘리엇의 황무지 1부 죽은 자의 매장 중 첫 번째 단락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