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은 예술작품이 일련의 내용으로 구성된다는 심히 미심쩍은 이론을 토대로 예술을 어지럽힌다. 예술을 지적 도식의 범주에 포함되는 일종의 실용 품목으로 만드는 것이다.”
- 수전 손택, <해석에 반대한다>
오래 전 일이다. 회사에서 뉴욕 출장일정이 확정된 뒤 내 머릿속에는 온통 일탈을 꿈꾸는 계획으로 가득했었다. 뉴욕이 어떤 곳인가. 현대미술관(MoMA)과 각종 박물관들이 즐비한 곳이다. 일정을 쥐어짜듯 노력한 결과 반나절의 자유시간이 생겼다. 주저 없이 현대미술관으로 달려갔다. 눈치 없는 후배 한 명이 나를 따라 나섰지만, 그건 중요한 변수가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앤디 워홀의 <캠벨 수프 캔> 앞에서 벌어졌다. 그림자처럼 내 뒤를 따라 걷던 후배가 워홀의 작품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평화롭던 내 침묵을 깨고 말았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되는 거죠?”
“해석? 무슨 해석?”
“이런 난해한 작품들은 관람객에게 해석의 여지를 주는 거라던데요?”
“난해? 뭐가 난해한데? 그냥 수프 캔들을 그린 거잖아.”
“그러게요. 그런데 제가 오기 전에 검색을 좀 해봤거든요. 앤디 워홀이 이런 수프 통조림을 나열해서 그린 것은 슈퍼마켓에 진열된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거나, 공장에서 대량생산되는 현실을 의미한다는 그런 말들이...”
후배는 말을 이어가지 못하고 표정이 굳어졌다. 그 역시 ‘그게 어쨌다나는 건가’에 봉착한 것일 게다. 현대미술이나 동시대미술 작품들을 접할 때 우리(?)는 수없이 이어지는 질문에 시달린다. 사물이나 인물, 자연을 그대로 캔버스에 옮겨놓은 그림들은 그저 감탄하면 그만이다. 피카소의 말을 흉내 내어 얘기하면, 그림은 마치 현실 같고 사진은 한 폭의 그림 같다고 감동하면 될 일이다. 비틀고 왜곡된 것만 같은 미술작품들은 관람객들에게 뭔가 생각할 것을 강요하는 것 같다. 20세기 초 마르셀 뒤샹이 하얀색 화장실 변기를 전시품으로 갖다 놓았을 때의 여파는 여전히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겪고 있는 듯하다. 왜 그럴까.
고흐를 포함한 세상 모두가 사랑하는 화가들의 작품들은 지금도 전 세계를 여행 중이다. 전시가 오픈되면 우리는 줄을 서서 그들의 붓질과 색감을 최대한 가까이 경험하고자 한다. 저마다 다르지만 감탄과 탄복은 기본이고, 학교는 학생들에게 관람을 중요한 현장학습으로 권하기도 한다. 전시를 준비하는 곳이나 전시장을 찾는 이들 모두에게 편안하고 행복한 일들이다. 그런데 수프 깡통 그림이라니, 심지어 공장에서 생산된 간장 병(일본의 기코만 간장)은 MoMA의 영구 소장품 중 하나이다.
옛날 옛적에는 (단테의 시대 정도로 해두자) 예술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 혁명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이었던 까닭에 그 경험이 여러 층위로 이뤄질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은 그렇지 않다. 오늘날의 예술 창작은 현대인의 삶에서 주된 고민거리인 과잉의 법칙을 강화할 뿐이다.
- 수전 손택, <해석에 반대한다> p.34
“그냥 봐. 이해고 해석이고 그게 뭐 어때서. 우리가 몰랐던 그림 속 비밀이라도 확인하면, 저게 갑자기 움직이기라도 할까? 우리가 스트레스 받으러 여기 온 거겠어?”
“맞는 말이네요.” 후배는 가볍게 웃고는 무겁고 격조있던 그 자리를 떠났다.
워홀의 캠벨 수프 통조림 연작은 32점으로 구성된다. (이걸 뉴욕현대미술관은 용케 모두 구입해서 보유 중이다.) 후배에게 이 말은 망설이다 끝내 해주지 않았지만, 사실 워홀 역시 무모한 해석 시도에 대해 간단한 말로 일침을 놓은 적이 있다.
“지난 20년간 캠벨 수프 통조림은 나의 점심 식단에서 빠진 적이 없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에 캠벨 통조림을 그렸다“고 했다. (한겨례신문 2011.7.18. 기사 재인용)
지금 중요한 것은 감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잘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임무는 예술작품에서 내용을 최대한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작품 속에 있는 것 이상의 내용을 더 이상 짜내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임무는 내용을 쳐내서 조금이라도 실체를 보는 것이다.
- 수전 손택, <해석에 반대한다> p.34
미술관을 왜 찾을까. 나는 머릿속이 복잡하고 번민하는 일이 생길 때, 침묵하며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할 때 미술관을 자주 찾는다. 미술관이 나의 ‘특별한’ 용도에 부합하는 장소는 아닐지라도, 그곳에서마저 예술작품에 대한 추리와 분석을 시도한다는 것은 최소한 내게는 터무니없는 일이다. 과천에 소재한 국립현대미술관은 입구에서부터 백남준의 <다다익선>이 압도적인 분위기를 선사하곤 했다. 세월이 흘러 브라운관 모니터들이 수명이 다한 후, 작품의 복원과 수정 등의 과정으로 다다익선은 상당기간 불 꺼진 괴물처럼 기괴하게 서 있었다. ‘플럭서스’ 운동의 멤버였던 백남준은 미래에 기술이 변화하고 발전하면 작품의 변화와 변형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동의했었다. 그런데 작품 원형을 유지해야 한다는 견해와 작가의 의도를 반영해야 한다는 의견의 상충은 이 작품을 1,003개의 모니터가 모두 꺼진 채로 서 있게 했다.
우리는 이미지와 영상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이 시대를 사는 내가 워홀이나 리히텐슈타인 같은 팝아트를 좋아하는 건 “너무나 뻔한, ‘보이는 그대로’를 내용으로”(수전 손택) 채워 넣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술을 즐기기 위해 복잡한 수식을 작성해놓고 해석으로부터 탈출했던 그들의 멱살을 잡아당길 필요까진 없는 일이다. 자칫하면 그림 옆에 붙어있는 짤막한 작품명과 설명 텍스트 카드가 그림과 융합되는 사태를 초래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자신의 작품에 대한 해석을 즐기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최소한 나와 그 후배는 ‘관람객’이다.
놀이? 시험? 아니면 실험? 이것이 모두 다이면서 또다른 무엇이다. 그것은 사진가의 탐색, 즉 자기가 만드는 영상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고 읽히며 해석되고 혹은 거부당하는지를 알고 싶은 욕망이다. 어떤 사진 앞에서건 관찰자는 자기 속의 무언가를 거기에 투사한다. 영상은 뜀틀과도 같은 것이다.
- 존 버거, 장 모르 <말하기의 다른 방법> p.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