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으로 가야하는 이유

by 현율


우리는 많은 경험 가운데 기껏해야 하나만 이야기한다. 그것조차도 우연히 이야기할 뿐, 그 경험이 지닌 세심함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 파스칼 메르시어, <리스본행 야간열차> p. 27, 들녘, 전은경 옮김


“리스본으로 가야겠어.”


나는 이따금 이 한 마디를 무심코 되뇌곤 한다. 삶의 부침이 고단하거나, 오늘의 시간들이 어제와 다르지 않다고 느낄 때 유독 이 말이 떠오른다. 내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포르투갈의 이 낯선 도시에 침착沈着하는 이유는 국내에 같은 해에 출간된 두 권의 책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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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책은 파스칼 메르시어가 쓴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이다.


시계추처럼 정확하게 반복되는 삶을 사는 ‘걸어다니는 사전’ 고전문헌학자 그레고리우스. 스위스 베른의 이른 아침,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학교로 가는 길에 다리 위에서 투신할 것처럼 보이는 젊은 여인을 발견한다. 무작정 그녀를 난간에서 끌어내리고 학교로 동행한 그 날 그의 운명은 급격한 변화를 맞는다. 낯선 여인이 사용하는 언어는 포르투갈어. 이름도 알 수 없는 그녀가 떠난 후 그는 서점에서 생경하고 낡은 포르투갈어 책 한권을 구한다. 제목은 <언어의 연금술사>. 그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거부할 수 없는 호기심에 이 책의 저자 아마데우 프라두의 흔적을 찾고자 결심하고, 리스본으로 가는 야간열차를 탄다.


소설은 그렇게 시작되어 아마데우 프라두가 쓴 문장들이 그레고리우스가 겪는 내적 갈등과 혼란, 그리고 삶에 대한 그의 새로운 시선들로 교차되며 이어진다. 액자 형식으로 구성된 소설 속 아마데우 프라두의 삶은 1974년 포르투갈 ‘카네이션 혁명’의 직전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파시즘의 혼란과 잔혹함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으니, 아마데우 프라두의 삶은 격정적이면서도 인생과 사회, 역사에 대한 진지한 질문과 탐구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내게 리스본이라는 기약 없는 여행지를 제시했던 또 다른 책은 <불안의 서>이다.

포르투갈 태생으로 리스본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지낸 페르난두 페소아의 자전적 산문이자 소설 또는 일기인 이 책은 그가 평생 남긴 문장들을 사후에 편집 출판한 책이다. 481편으로 구성되어 7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은 비슷한 시기에 접한 <리스본행 야간열차> 속 아마데우 프라두의 문장들과 전혀 다른 지점에 서 있다. 페소아의 자전적 문장들이라고 보아야 할 이 책은 시종일관 사회적 관계와 역사에 대해 냉소적인 시선을 견지한다. 그리고 이 책은 그의 인생을 반추하듯 짙은 고독과 내면의 독백들로 가득하다.


살아간다는 것은 다른 존재가 된다는 의미다. 어제 느낀 것처럼 오늘도 똑같이 느낀다면, 그것은 느낌이 불가능해졌다는 의미다. 어제처럼 오늘도 같은 느낌이라면, 그것은 느낀 것이 아니라 어제 느꼈던 것을 오늘 기억해낸 것이며, 어제는 살아 있었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은 것의 살아 있는 시체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p.185 (봄날의 책, 2014)


페소아는 한결같은 단조로움과 지루한 일상이 벗어날 수 없는 삶의 본질과도 같으며,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꾸고 있는 꿈일 수도 있다고 묻는다.


우리가 진실이라고, 옳다고 여기는 많은 일들이 우리들 꿈의 흔적일 뿐이고, 잠에 취한 우리의 이성이 생각 없이 흔들거리며 돌아다니는 것에 불과하구나! (p.365)


물론 <불안의 서>가 극단적인 고독과 우울만을 읊고 있는 것은 아니다. 페소아는 예술과 창작이 갖는 본질에 대해 그 어떤 표현들보다 아름다운 문장들로 설명하고 있으며, 일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타인과의 정서적 유대감도 언급한다. 그러나 내 눈에는 <리스본행 야간열차> 속 그레고리우스가 겪었던 단조로운 일상의 고독이 페소아의 <불안의 서>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그레고리우스는 어느 순간 수십 년을 이어온 건조한 일상을 단숨에 깨버리고 미지의 도시 리스본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떼어낸다. 그가 알지 못하는 시기에 삶에 대한 번민을 지속했던 프라두를 만나러 가는 길은 마치 페르난두 페소아의 흔적을 찾는 일처럼 느껴졌다. 삶의 궤적에서 벗어나 근원적 질문이 시작된 지점을 찾아 가는 곳이 리스본이었던 셈이다.


그는 이 포르투갈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고, 움직이는 모습도 보고 싶었다. (p.32)


그는 자기 인생의 뼈대를 만든 도시에서 도망 중이었고, 15년 동안 살았던 집에서 몸을 숨겨야 했다. 기괴하고 우스꽝스러우며 서툰 희극 같은 사실이었지만, 그가 지금까지 경험하고 행동했던 일들보다 더 진지했다. (p.33)


아마데우 프라두는 리스본의 의사이다. 생명을 경시할 수 없었던 그는 독재정치의 폭력과 잔혹함의 대명사, ‘리스본의 인간백정’인 멩지스를 응급환자로 만나 살려주고, “더 이상 살아 있지 않아야 이루어질 정의” (p. 241)를 배신했다는 이유로 갈등한다. 그레고리우스는 페소아의 고독과 프라두의 번민을 모두 보았을 것이다. 리스본에서.


그래서 나는 일상이 고통스러울 때 리스본으로 떠나는 여행을 꿈꾼다. 그곳에 도착하면 누구를 만나 무슨 질문을 해야할지는 여전히 모른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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