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은 창작의 원천인가

by 현율



-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의

완벽한 그림인 선명한 문장(紋章)들은

‘악마’가 자기 일을 늘 잘해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 샤를 보들레르, ‘고치지 못하는 것’ 중

우울과 중독은 창작의 원천일 수 있을까


섣불리 얘기하자면 나는 지독한 커피 중독자이다. 그것도 수십 년이 넘도록 이어진 증세이니, 어디 가서 중독에 대한 이야기로 몇 시간은 거뜬히 떠들어 댈 수도 있다. 이렇다보니 누군가는 커피에 대한 나름의 철학이라도 있을 법하다고 말하겠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도 않다. 출근길에 첫 눈에 보이는 카페에서 1천 원대 커피를 들고 나오기도 하고, 때로 ‘커피명장’이라고 불리는 사장이 운영하는 곳에서 1만원에 육박하는 커피를 선선히 주문하기도 한다. 그럼 지금의 내 상태는 커피가 아닌 카페인 중독에 해당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또한 단호하게 부인할 수 있는 것이, 커피가 아닌 다른 카페인 음료는 거의 입에 대지 않는다. 다만 철학까지는 아니지만, 커피에 대한 몇 가지 분명한 습관은 갖고 있다. 커피에 우유든 설탕이든 어떤 것도 넣어선 안 된다거나, 아무리 비싼 커피도 차가운 것은 입에 대지 않는 식이다. 오로지 뜨거운, 아무것도 넣지 않은 가급적 진한 커피이어야 한다.


청소년 시기 입시를 명분으로 수면 시간을 줄여보고자 경험했던 커피는 언제부터인가 집중이 필요할 때 반드시 있어야할 음료가 되었다. 아침식사는 걸러도 커피는 마셔야 한다거나, 좋은 커피를 마시면 그날 하루는 운이 좋을 거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렇다보니 뭔가 머릿속에서 해소되지 않는 상황에 봉착하면 커피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자조하는 일도 빈번하다. 이런 자가당착 상황에서 자주 떠오르는 표현이 이것이었다.

“보들레르도 그랬잖아. 심지어 그 친구는 커피도 아니고 해시시였어.”


보들레르가 당대의 문인들이나 예술가들과 함께 마약에 심취했던 사실은 이제 공공연한 일이다. 당시 눈부시게 부흥했던 대도시 파리의 이른바 ‘해시시클럽’ 멤버들은 화려했다. 빅토르 위고를 포함해 발자크, 뒤마에 화가를 포함한 다른 예술가들도 해시시가 필요했던 인물들이다. 이들 모두 내가 청소년기에 심취했던 문인들인데, 뒤늦게 해시시클럽 이야기를 접했던 나는 한동안 혼란을 겪어야 했다. ‘마약이 아니면 창작이 어려웠던가.’ <삼총사>의 용맹함은 뒤마가 해시시에 취했기 때문에 나온 건가? <레 미제라블>의 장대한 서사나 발자크의 사실주의가 마약 덕택이라니. 이런 혼란스러운 질문들 속에서도 내게 보들레르만큼은 왠지 동정과 연민을 느끼는 인물이었다. 예민한 정서와 우울을 함께 안고 살았던 인물, 그는 화려한 대도시 파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던 시인이었다. 해시시의 영향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시집 <악의 꽃>은 이전에는 없었던, 앞으로는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를 수밖에 없는 작품집이었다.

커피 이야기에 굳이 보들레르나 문인들의 해시시클럽까지 떠올려야 하겠냐고 묻는다면, 짐 자무쉬가 연출한 영화 <커피와 담배> 이야기를 하고 싶어진다. 국내에는 2006년에 개봉했지만, 사실 감독은 훨씬 이전부터 이 단편들을 찍고 있었다. 영화는 단순한 포맷 위에 11개의 에피소드로 그려진다. 인물들은 다양하지만, 모든 인물들의 대화는 커피와 담배 위에서 벌어진다. 인물간의 어긋나고 틀어진 대화들, 엉뚱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인식들 속에서도 커피와 담배는 배제할 수 없는 현대인의 삶으로 보인다. 마치 19세기 파리의 불운했던 문인 보들레르에게 해시시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진지하다가도 웃게 되는 영화 속 에피소드들 사이에 커피에 중독되어 손까지 떠는 인물들의 모습이 비친다. 영화 속에서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며 황홀해하는 표정은 당시 극장에서 나온 수많은 관객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담배를 꺼내 물게 한 장면이기도 하다. 영화 <커피와 담배>는 대중들의 중독에 관한 가장 현대적인 묘사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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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들레르 <악의 꽃>에 포함된 시 ‘고치지 못하는 것’은 극복하기 어려운 인간의 현실 고통과 불행, 어두운 운명을 화려하지만 차가운 단어들로 묘사한다. 시인은 그것을 “‘악마’가 자기 일을 늘 잘 잘해내고 있다"라고 하거나, “냉소적인, 지옥 같은 등불”이라고 이야기한다. 그가 ‘고쳐지지 않는' 창작의 고통을 덜기 위해 해시시를 찾았는지, 아니면 해시시를 겪고 난 후 세상의 어둠은 '고쳐지지 못할' 운명이라고 이야기 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보들레르의 시들을 읽기 위해 커피가 필요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