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눈깨비 내리는 거리, 젖은 아스팔트 위의 발자국
퇴근길이었다. 회사 건물을 나서는 순간 얼굴에 차가운 무언가가 닿았다. 눈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진눈깨비였다. 백설과 빗방울의 중간쯤 되는 것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함박눈처럼 낭만적이지 않았고, 깨끗한 하얀색도 아니었다. 회색빛 하늘에서 내리는 회색빛 얼음 알갱이들. 땅에 닿자마자 녹아버리는, 쌓일 수 없는 눈.
우산을 펼쳤다. 가방에 항상 넣어두는 작은 접이식 우산이었다. 우산 위로 진눈깨비가 톡톡 떨어졌다. 비 오는 소리와 눈 내리는 소리의 중간쯤 되는 소리였다. 사람들이 하나둘 우산을 펴기 시작했고, 거리가 온통 우산으로 뒤덮였다. 검은색, 회색, 남색 우산들이 물결치듯 움직이는 광경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우리는 모두 비슷한 색의 우산을 쓰고 있구나. 도시는 이렇게 회색으로 통일되어가는구나.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며 발밑을 봤다. 아스팔트가 젖어 있었다. 반질반질하게 빛났다. 가로등 불빛이 젖은 바닥에 반사되어 일렁였다. 발을 디딜 때마다 물이 튀어 신발이 젖는 게 느껴졌다. 양말까지 스며드는 차가움이 발끝에서 시작되어 발목까지 올라왔다. 불쾌한 촉감이었지만, 동시에 이상하게 계절을 실감하게 했다. 겨울이 피부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모두 빠른 걸음이었다. 추위를 피하려는 걸음, 집으로 가려는 걸음, 따뜻한 곳을 찾아가는 걸음들이었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우산을 낮게 숙이고 빠르게 걸었다. 진눈깨비가 얼굴에 계속 닿았다. 녹으면서 차가운 물방울이 되어 뺨을 타고 흘렀다. 마치 도시가 울고 있는 것처럼, 아니 도시를 걷는 사람들이 함께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렸다. 옆에 선 사람도 우산을 쓰고 있었다. 서로 얼굴을 보지 않았다. 그냥 신호등만 바라봤다. 빨간 불이 깜빡였고, 초록불로 바뀌었다. 사람들이 일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우산들이 부딪칠 듯 말 듯 서로를 피하며 움직였다. 우리는 가까이 있으면서도 멀었다. 같은 날씨를 맞고 있으면서도 각자의 우산 안에 갇혀 있었다.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가니 따뜻한 공기가 얼굴을 감쌌다. 우산을 접었다. 물이 뚝뚝 떨어졌다. 바닥에 작은 웅덩이가 생겼다. 우산을 털어 물기를 제거하고 가방에 넣었다. 손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플랫폼으로 걸어갔다. 손가락 끝이 저리도록 차가웠다. 피가 통하지 않는 것처럼 감각이 무뎌져 있었다.
사람들로 가득했다. 모두 젖은 외투를 입고 있었고,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사람도 있었다. 축축한 공기가 역 안을 채웠다. 비 냄새, 아니 겨울비 냄새, 그것도 아닌 젖은 옷과 차가운 계절이 뒤섞인 냄새가 났다. 이 냄새는 겨울만의 것이었다. 불쾌하면서도 익숙한, 싫으면서도 해마다 맡게 되는 그런 냄새.
전광판을 봤다. 2분 후 열차 도착. 사람들은 나란히 서서 기다렸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그냥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나는 오늘 하루를 떠올렸다. 회의, 서류 더미, 쏟아지는 이메일, 끊이지 않는 전화. 평범한 하루였다. 특별한 일은 없었지만 피곤했다. 몸이 무거웠다. 마음도 무거웠다. 집에 가고 싶었다.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열차가 들어왔다. 쇠 바퀴가 레일과 마찰하며 내는 날카로운 소리가 귀를 찔렀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도 젖어 있었다. 우산을 들고 있거나 외투에 물기가 배어 있었다. 나는 그 사이를 비집고 열차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가 없어 손잡이를 잡고 섰다. 열차가 출발했고, 몸이 앞뒤로 흔들렸다. 옆 사람과 어깨가 부딪쳤지만, 서로 사과하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이 무색할 만큼 모두가 지쳐 있었다.
창밖을 봤다. 어둠뿐이었다. 가끔 터널 벽이 스쳐 지나갔고, 형광등 불빛이 깜빡였다. 내 얼굴이 창문에 희미하게 비쳤다. 피곤한 얼굴이었다. 눈 밑이 어두웠고, 입가가 처져 있었다. 저게 나구나 싶었다. 하루를 살아낸 사람의 얼굴이었다. 아니, 하루를 견뎌낸 사람의 얼굴이었다.
옆에 선 사람이 기침을 했다. 콜록콜록. 감기에 걸린 것 같았다. 날씨가 이러니 당연했다. 기분인지 모르지만 나도 목이 간질거렸다. 감기 기운이 도는 것 같았다. 집에 가면 따뜻한 차를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생강차나 유자차 같은 것. 몸을 녹여줄 뭔가. 이 겨울을 버틸 수 있게 해줄 뭔가.
내릴 역이 가까워졌다. 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출구 쪽으로 이동했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나갔다. "죄송합니다" 하고 중얼거렸지만 아무도 듣지 못했을 것이다. 모두 자기 일에 바빴으니까. 자기 피로에 집중하고 있었으니까. 문이 열리고 플랫폼으로 내렸다.
계단을 올라갔다. 지상으로 나가는 계단을 한 계단씩 오르며 생각했다. 밖에는 여전히 저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을까. 아니면 그쳤을까. 혹시 제대로 된 함박눈으로 바뀐 건 아닐까. 아이처럼 기대하는 마음이 있었다. 출구에 도착했다. 문을 밀고 나갔다.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진눈깨비가 여전히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우산을 펼쳤다. 젖은 우산이라 물이 튀었다. 소매가 젖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집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어차피 이미 젖을 대로 젖었으니까. 걸었다. 빠르게 걸었다. 집 생각만 났다. 따뜻한 집, 마른 옷, 뜨거운 차, 부드러운 침대. 그 모든 것이 기다리고 있을 그곳.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가로등 불빛이 어둠을 밀어냈다. 불빛 아래로 눈발이 보였다. 하얗게 떨어지는 것들이 아니라 회색빛으로 떨어지는 것들이었다. 땅에 닿기 전에 이미 녹기 시작하는 얼음 알갱이였다. 쌓이지 않는 백설,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겨울, 그냥 스쳐 지나가는 계절의 한 조각.
발자국 소리가 났다. 내 발자국 소리였다. 찰싹, 찰싹. 젖은 바닥을 밟는 소리였다. 뒤를 돌아봤다. 발자국이 보였다. 젖은 아스팔트 위에 남은 희미한 흔적이었다. 하지만 금방 사라질 것이다. 빗물이, 아니 녹은 눈이 그 흔적을 지울 것이다. 내가 걸어온 길은 곧 사라진다. 모든 것이 그렇듯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눈발이 내 얼굴로 떨어졌다. 차갑고 축축했다. 낭만적이지 않았다. 영화 속 백설처럼 아름답지도 않았다. 그냥 추운 겨울날의 불편함일 뿐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계절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겨울이 왔다는 것, 한 해가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것. 시간은 이렇게 차갑고 축축하게 흘러간다는 것을.
집 앞에 도착해 현관문 앞에 서서 우산을 털었다.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우산을 접고 문을 열었다. 따뜻한 공기가 쏟아져 나왔다. 안으로 들어가 신발을 벗었다. 양말이 축축하게 젖어 있어 벗어서 빨래 바구니에 넣었다. 외투도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물이 뚝뚝 떨어졌다. 하루의 무게가 떨어지는 소리 같았다.
거실로 들어가니 아내가 부엌에 있었다. "왔어?" "응." "밖에 눈 와?" "응, 진눈깨비." "추웠지?" "많이." 간단한 대화였다. 더 길게 말할 필요가 없었다. 서로 알았으니까. 추운 날, 젖은 옷, 피곤한 몸. 말하지 않아도 이해되는 것들이 있었다. 오래 함께 산 사람들 사이에는.
소파에 앉아 창밖을 봤다. 어둠 속에서 진눈깨비가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창문에 부딪치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똑, 똑. 규칙적인 소리였다. 듣고 있으니 마음이 진정됐다. 밖은 춥지만 안은 따뜻했다. 나는 집에 있었다. 이곳에 도착했다. 오늘도 무사히 돌아왔다.
뜨거운 차를 마셨다. 아내가 끓여준 생강차였다. 컵을 두 손으로 감쌌다. 따뜻했다. 얼어붙었던 손가락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한 모금 마셨다. 목으로 넘어가며 몸속이 따뜻해지는 게 느껴졌다. 생강의 매운맛이 혀끝에 남았다. 좋았다. 이런 날에는 이런 차가 필요했다. 몸을 녹여주는 것, 마음을 진정시켜주는 것.
텔레비전에 뉴스가 나왔다. 앵커가 날씨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오늘 전국적으로 비 또는 눈이 내렸습니다. 내일도 비슷한 날씨가 이어질 전망입니다." 날씨는 계속 추울 것이다. 겨울이니까. 12월이니까. 한 해가 끝나가고 있으니까. 모든 것이 끝을 향해 가고 있으니까.
아이가 방에서 나왔다. "아빠, 밖에 눈 와?" "응, 조금." "많이 와?" "아니, 조금만." "쌓여?" "아니, 안 쌓여." 실망한 얼굴이었다. 눈사람을 만들고 싶었나 보다. 하지만 이런 백설은 쌓이지 않는다. 땅에 닿자마자 녹아버리니까. "내일은 쌓일까?" "모르겠어. 어쩌면." 거짓말은 아니었다. 정말 모르는 일이었다. 우리는 내일의 날씨조차 확신할 수 없다. 내일의 날씨뿐 아니라 내일의 모든 것을.
저녁을 먹고 다시 창밖을 봤다.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멈추지 않는 진눈깨비. 하루 종일 내릴 것 같았다. 밤새 내릴 것 같았다. 내일 아침까지 내릴 것 같았다. 하지만 쌓이지는 않을 것이다. 계속 녹을 것이다. 내리고 녹고, 내리고 녹고, 그 반복. 우리의 날들도 그런 게 아닐까 생각했다. 쌓이지 않고 녹아버리는 날들. 흔적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지는 시간들.
침대에 누웠다. 창문 너머로 눈발이 보였다. 가로등 불빛에 비친 하얀 점들이었다. 아니, 회색 점들이었다. 떨어지고 있었다. 끝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언제 그칠까. 모르겠다. 내일이면 그칠까. 어쩌면. 아니면 계속 내릴까. 그것도 모를 일이다.
오늘 하루를 떠올렸다. 출근, 회의, 점심, 야근, 퇴근, 진눈깨비. 평범한 하루였다. 특별한 일은 없었다. 하지만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진눈깨비가 내리던 날로. 우산을 쓰고 젖은 거리를 걸었던 날로. 발자국이 금방 사라지던 날로.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모든 날이 사실 이렇다는 것을. 특별해 보이지 않는 날들이 모여 한 해를 만들고, 한 해가 모여 인생이 된다는 것을.
눈을 감았다. 귓가에 아직도 눈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창문에 부딪치는 소리, 똑똑. 바람 소리, 쉬익. 차가운 겨울의 소리였다. 하지만 무섭지 않았다. 나는 이불 속에 있었고, 집 안에 있었으며, 따뜻한 곳에 있었다. 그리고 내일도 이 소리를 들을 것이다. 다른 날에도, 다른 겨울에도.
내일도 눈이 올까. 아니면 비가 올까. 아니면 그칠까. 알 수 없었다. 날씨는 예측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눈이 오든 비가 오든, 나는 우산을 들고 나갈 것이다. 출근할 것이고, 일할 것이며, 퇴근할 것이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매일 그랬듯이. 내일도, 모레도.
진눈깨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도시를 적시고 있었다. 거리를 축축하게 만들고 있었다.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겨울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계절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한 해가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쌓이지 않는 백설이라도, 땅에 닿자마자 녹아버리는 얼음 알갱이라도, 그것은 분명 내렸다.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졌다. 그것만으로 의미가 있었다.
잠이 왔다. 눈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다. 내일은 또 다른 12월의 하루가 올 것이다. 눈이 오든 오지 않든. 추우든 덜 추우든. 삶은 계속된다. 하루하루가 쌓여서 한 해가 된다. 완벽하지 않은 날들이 모여서 나름대로의 겨울이 된다. 진눈깨비처럼, 쌓이지 않아도, 흔적을 남기지 않아도, 그래도 내렸다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는 것처럼.
우리의 하루도 그런 게 아닐까. 특별하지 않아도, 기억에 남지 않아도, 그저 지나가기만 해도, 살았다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 진눈깨비가 땅에 닿는 순간 녹아버려도 여전히 진눈깨비인 것처럼, 우리의 평범한 날들도 흘러가버려도 여전히 우리의 날들인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