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연락처를 정리하며
주말 오후였다. 스마트폰을 들고 연락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오래 미뤄왔던 일이었다. 연락처가 너무 많아져서 찾기 힘들 정도였고, 더 이상 연락하지 않는 사람들도 수백 명이 저장되어 있었다. 이름을 스크롤하며 내려가기 시작했다. ㄱ, ㄴ, ㄷ... 익숙한 이름들이 지나갔다.
대학 동기 이름이 나왔다. 마지막으로 연락한 게 언제였을까. 확인해봤다. 3년 전이었다. "잘 지내?" "응, 잘 지내. 너는?" "나도." 그게 마지막 대화였다. 그 이후로 아무 연락이 없었다. 삭제할까 생각했다가 그냥 놔뒀다. 언젠가 또 연락할 수도 있으니까. 아니, 솔직히 말하면 삭제할 용기가 없었다. 이름을 지우는 순간 그 사람과의 연결이 완전히 끊어질 것 같았다.
더 내려갔다. 첫 직장 동료 이름이 나왔다. 반가웠다. 그때가 떠올랐다. 함께 야근하고, 함께 회식하고, 함께 불평하던 시절. 젊었다. 열정도 있었고 미래도 밝아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회사에 있고, 다른 삶을 살고 있으며, 서로 안부조차 묻지 않는다.
연락처 정리를 멈추고 사진첩을 열었다. 오래된 사진들을 보고 싶어졌다. 스크롤을 쭉 내렸다. 몇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2015년쯤의 사진들이 나왔다. 10년 전이었다. 사진 속에 내가 있었고, 친구들이 있었으며, 웃고 있었다. 젊은 얼굴들이었다. 주름이 없었고, 머리가 풍성했으며, 눈빛이 맑았다.
한 장의 사진을 확대했다. MT 갔을 때 찍은 사진이었다. 산 정상에서 찍은 단체 사진이었는데, 모두 땀을 흘리며 웃고 있었다. 힘들었지만 즐거웠던 순간이었다. 이 사진 속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연락하는 사람은 한두 명뿐이고, 나머지는 소식조차 모른다.
사진을 넘겼다. 군대 전역식 사진이 나왔다. 부모님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얼마나 기뻤던지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스물다섯이었다. 이제 막 사회로 나가려는 시점이었고, 모든 게 가능해 보였으며, 세상이 넓어 보였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세상은 생각보다 좁았고, 가능한 것도 많지 않았으며, 현실은 냉정했다.
소파에 앉아 사진을 계속 넘겼다. 결혼식 사진이 나왔다. 아내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둘 다 젊었고, 행복해 보였으며, 미래가 밝아 보였다. 실제로 행복했다. 그때는 몰랐다. 결혼 생활이 이렇게 복잡할 줄, 아이를 키우는 게 이렇게 힘들 줄, 살아가는 게 이렇게 버거울 줄.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힘들어도 행복했고, 복잡해도 의미 있었으며, 버거워도 살 만했다. 아내와 아이가 있으니까. 가족이 있으니까. 돌아갈 곳이 있으니까.
아이 사진들이 쏟아져 나왔다. 갓 태어났을 때, 백일, 돌, 첫 걸음, 첫 말, 어린이집 입학. 모든 순간을 사진으로 남겼다. 지금 보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얼마나 작았는지, 얼마나 귀여웠는지,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그 아이가 지금은 자라서 방에서 숙제를 하고 있었다. 시간이 빨랐다.
사진첩을 닫고 다시 연락처로 돌아갔다. 정리를 계속해야 했다. 이름들을 하나씩 보며 결정했다. 이 사람은 남기고, 이 사람은 지우고. 하지만 대부분 남겼다. 지울 수 없었다. 연락하지 않아도, 만나지 않아도, 이름만이라도 남겨두고 싶었다. 그 사람들과의 시간이 있었다는 증거로.
고등학교 친구 이름이 나왔다. 가장 친했던 친구였다. 매일 함께 등교하고, 함께 점심 먹고, 함께 하교했다. 비밀도 공유하고, 꿈도 이야기하고, 미래도 계획했다. 하지만 대학 가고 나서 점점 멀어졌고, 군대 가고 나서는 거의 연락이 끊겼으며, 지금은 1년에 한 번 정도 안부 문자를 주고받을 뿐이다.
그 친구는 지금 부산에 산다. 결혼했고, 아이가 둘이며, 자기 사업을 한다고 들었다. 잘 지내는 것 같았다. 행복해 보였다. SNS에 올리는 사진들을 보면. 하지만 직접 물어보지는 못한다. 어색하니까.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났으니까.
문자를 보낼까 생각했다. "요즘 어떻게 지내?" 간단한 안부였다. 하지만 보내지 못했다. 무슨 대답이 올지 알 수 없었고, 대화가 이어질지 확신할 수 없었으며, 괜히 어색해질까 봐 두려웠다. 그냥 놔뒀다. 연락처에 이름만 남겨두고.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천장을 봤다. 그리움이 밀려왔다. 돌아갈 수 없는 시간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함께했던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젊었던 나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모든 게 가능해 보였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시간은 앞으로만 흐르니까.
연락처 속 이름들이 떠올랐다. 수백 명의 이름이었다. 각각의 이름 뒤에는 이야기가 있었다. 함께했던 시간, 나눴던 대화, 공유했던 순간들. 하지만 지금은 대부분 연락하지 않는다. 삶이 바빠서, 거리가 멀어서, 공통점이 없어서, 어색해서. 수많은 이유로 멀어졌다.
하지만 그게 슬픈 건 아니었다. 자연스러운 거였다. 사람은 만나고 헤어진다. 가까워졌다가 멀어진다. 함께하다가 각자의 길을 간다. 그게 인생이었다. 모든 인연을 평생 유지할 수는 없으니까.
중요한 건 그때 함께했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멀어졌어도 그 시간은 의미 있었다는 것이었다. 서로에게 영향을 줬고, 함께 성장했으며, 추억을 만들었다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서랍을 열었다. 오래된 상자가 하나 있었다. 추억 상자였다. 가끔 꺼내보는 것들이 들어 있었다. 상자를 꺼내 열었다. 먼지가 날렸다. 오래 열지 않았나 보다.
안에는 편지가 몇 통 있었다. 고등학교 때 받은 편지들이었다. 친구들이 쓴 편지, 졸업할 때 주고받은 편지들이었다. 하나를 꺼내 펼쳤다. 친구의 글씨였다. "넌 꼭 성공할 거야. 난 믿어. 그리고 나중에 만나면 밥 사." 웃음이 나왔다. 성공했나. 글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살아는 있다. 그것만으로도 괜찮은 것 같다.
다른 편지도 읽었다. "대학 가도 연락하자. 자주 만나자." 하지만 자주 만나지 못했다. 처음 몇 달은 만났지만 점점 횟수가 줄었고, 결국에는 연락도 끊겼다.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하지만 그때는 진심이었다. 정말 자주 만나고 싶었고, 영원히 친구로 지내고 싶었다.
사진도 몇 장 나왔다. 인화된 사진들이었다. 요즘은 모두 디지털이지만 그때는 필름 카메라로 찍었고, 사진관에서 인화했으며,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사진을 가졌다. 사진이 바래 있었다. 색이 흐려졌고, 모서리가 구겨졌으며, 얼룩도 있었다. 하지만 소중했다. 그 순간을 담고 있으니까.
상자를 다시 닫고 서랍에 넣었다. 추억은 가끔씩 꺼내보는 게 좋다. 너무 자주 보면 감정이 무뎌지고, 너무 오래 안 보면 잊어버리니까. 적당히, 가끔씩, 그리워질 때.
스마트폰을 다시 들었다. 연락처를 봤다. 결국 아무도 지우지 않았다. 모두 남겨뒀다. 연락하지 않아도, 만나지 않아도, 이름은 여기 있었다. 내 스마트폰 안에, 내 기억 속에.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문득 한 친구에게 문자를 보내고 싶어졌다. 오랜만에 안부를 묻고 싶었다. 손가락을 움직여 메시지 창을 열었다. "잘 지내?" 타이핑했다가 지웠다. "요즘 어때?" 타이핑했다가 또 지웠다. "보고 싶다" 타이핑했다가 또 지웠다. 결국 보내지 못했다. 그냥 생각만 했다.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있기를 바랐다.
창밖을 봤다. 12월의 오후였다. 해가 지고 있었다. 한 해도 지고 있었다. 시간은 계속 흘렀고, 사람들은 계속 멀어졌으며, 추억은 계속 쌓였다. 하지만 그게 슬프지만은 않았다. 그리움이 있다는 건 소중한 시간이 있었다는 증거니까.
침대에 누웠다.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냥 연락처를 보고, 사진을 보고, 추억을 꺼내봤을 뿐이었다. 생산적이지 않았고, 의미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필요했다. 가끔은 이런 시간이 필요했다. 과거를 돌아보고, 그리워하고, 그 시간들을 음미하는 시간.
스마트폰을 충전기에 꽂았다. 연락처 정리는 실패했다. 한 명도 지우지 못했다. 하지만 괜찮았다. 지울 필요가 없었다. 모두 나의 일부였으니까. 만나지 않아도, 연락하지 않아도, 각자의 자리에서 잘 지내고 있을 사람들이었다.
눈을 감았다. 이름들이 떠올랐다. 친구들, 동료들, 선후배들. 모두 어딘가에 있었다. 살아가고 있었다. 나처럼 바쁘게, 나처럼 피곤하게, 나처럼 최선을 다하며. 언젠가 다시 만날 수도 있고, 영영 못 만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함께했던 시간은 사라지지 않으니까.
그리움은 아픔이 아니었다. 사랑의 다른 이름이었다. 소중했기에 그리워하는 것이고, 의미 있었기에 기억하는 것이며, 행복했기에 다시 떠올리는 것이었다. 연락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마음속에 있으면 됐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삶을 살면 됐다. 그리고 가끔, 아주 가끔, 이렇게 생각해주면 됐다. 잘 지내고 있을 거라고. 행복하기를 바란다고.
잠이 왔다. 꿈에서 그들을 만날지도 몰랐다. 젊었던 우리의 모습으로, 웃고 있는 얼굴로. 그리고 깨어나면 또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그들 없이, 하지만 그들을 기억하며.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