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의 고요

서두르지 않는 마음으로, 하루의 끝을 건너는 법



하루의 끝,

사무실 불이 하나둘 꺼진다.

책상 위 커피잔에는 미지근한 흔적이 남아 있고,

그 옆엔 다 하지 못한 메모가 놓여 있다.


내일 할 일인지, 오늘 못 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내일의 나에게 맡기기로 한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누군가의 인사가 공기 속을 흩어진다.

그 말이 사라진 자리엔 묘한 여운과 적막이 남는다.


가방을 들어 올리며 나도 작게 인사한다.

“수고하셨습니다.”

형광등 아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다.

그 그림자는 오늘 하루의 무게를 닮아 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힌다.

‘일’이라는 단어가 천천히 멀어진다.

층수가 내려갈수록

해야 할 일, 조심해야 할 말들,

그 모든 것이 조금씩 가벼워진다.


1층.

문이 열리고 바깥 공기가 스며든다.

낮 동안 뜨거웠던 도시는

이제 푸른빛으로 식어 있다.


검은색과 보라색 사이 어딘가,

일과 쉼의 경계.

나는 지금 그 사이를 걷는다.



버스 정류장이 보이지만,

오늘은 타지 않기로 한다.

그냥 걷고 싶다.

하루를 조금 더 천천히 흘려보내고 싶어서.


거리의 불빛들이 길게 늘어진다.

바람이 머리칼을 스치고,

어디선가 구워지는 빵 냄새가 스며든다.

한 발, 또 한 발.

도시의 리듬이 내 호흡과 맞아 떨어진다.


멀리서 웃음소리가 들린다.

신호음, 자동차 소리,

낮에는 소음이던 것들이

지금은 묘하게 위로가 된다.


세상이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 같아서.



신호등 앞에서 멈춰 선다.

가로등 불빛 너머 달이 보인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존재.

기쁘든, 지치든,

달은 늘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괜찮아, 오늘도 잘했어.”

그 말이 내 안에서 들린다.

누가 한 말도 아닌데,

그 한마디에 마음이 풀린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냥 오늘을 살아냈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 충분하다.



집 근처 골목에 들어서면

공기가 한층 더 차분해진다.

가로등 아래 앉은 사람들,

그들의 어깨 너머로 흘러나오는 음악.

그 평범한 장면이 묘하게 따뜻하다.


나만 힘든 게 아니구나.

모두가 각자의 하루를 버티고 있다.

나는 굳이 들어가지 않고

그 불빛을 잠시 바라본다.


오늘의 끝은

무엇을 하는 게 아니라

멈춰 서 있는 그 순간에 있다는 걸 안다.

맥주를 마시지 않아도,

노트를 펼치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이렇게 서 있는 것,

그게 오늘의 쉼이다.



집 앞에 선다.

현관문 손잡이를 잡은 채 한참을 서 있다.

그 안으로 들어가면 하루가 완전히 끝난다.


아직은 그 사이에 머물고 싶다.

밖과 안 사이, 일과 쉼 사이,

오늘과 내일 사이.


숨을 고른다.

오늘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아도 된다.

기록하지 않아도, 반성하지 않아도,

그저 이렇게 조용히 멈춰 있는 것.

그게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쉼이다.



문을 열고 들어간다.

불을 켜지 않은 어둠이 나를 감싼다.

무섭지 않다.

오히려 안전하다.

이 어둠 속에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된다.


신발을 벗고 가방을 내려놓는다.

몸의 긴장이 천천히 풀린다.

소파에 앉아 숨을 고른다.

시간이 흘러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지금 멈춰 있다는 것.





고요는 도착이 아니다.

그저 서두르지 않는 마음의 또 다른 이름이다.

오늘의 끝에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하고 있다.

쉬고, 호흡하고, 존재한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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