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나를 쓰다

조용히 나를 정리하는 시간



밤은 조용하다.

세상은 여전히 움직이지만,

이 시간만큼은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다.


책상 위 작은 스탠드 불빛 아래,

나는 펜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는다.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를 때가 있다.

그럴 땐 그냥 손끝으로

잉크의 흐름만 느낀다.

글이 아니라, 마음이 움직이게 두는 시간이다.



창밖을 본다.

불빛이 드문드문 켜져 있다.


늦게 퇴근하는 사람들의 차가 지나가고,

불 꺼진 상가의 유리문이

어둠 속에서 반짝인다.


모두가 오늘의 끝을 향해 흘러간다.

나는 그 흐름에서 조금 비켜 서 있다.

조용히 앉아,

오늘 하루의 문장들을 되짚어본다.


이상하게도 괜찮았던 일보다

아쉬웠던 일들이 더 오래 남는다.


아침에 마신 커피의 온기는 잊었지만,

점심때 나눈 어색한 대화는

아직 귓가를 맴돈다.


그때 다른 말을 했다면 어땠을까.

조금 더 솔직했다면,

혹은 조금 덜 솔직했다면.


하지만 그것도 괜찮다.

사는 건 잘하는 게 아니라

그냥 이어가는 일이니까.



책상 위를 본다.

커피는 이미 식었고,

덮지 못한 노트가 벌어진 채 놓여 있다.

그 위엔 어제 적다 만 문장 하나.

“오늘도 별일 없기를.”


별일 없다는 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저 또 한 번 버텼다는 뜻이다.

무너지지 않고, 깨지지 않고,

하루를 통과했다는 의미다.



펜 끝이 종이를 스친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단어들이 흘러나온다.

하루의 풍경이, 마음의 결이

글자 속으로 스며든다.


오늘 본 하늘의 색,

길에서 마주친 고양이,

엘리베이터 안의 웃음소리.

사소한 것들이 문장이 되어

조용히 쌓여간다.


누구에게 보여주지 않아도 좋은 기록.

누가 읽지 않아도 괜찮은 문장.

이건 나를 위한,

오직 나만의 시간이다.

좋아요도, 공감도 필요 없다.

오늘을 잃지 않기 위해,

이 순간을 잊지 않기 위해 적는다.



글을 쓴다는 건 참 묘하다.

머릿속에선 분명했던 감정이

막상 글로 옮기면 흐릿해진다.

단어를 찾다 엉뚱한 표현에 닿기도 한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무언가가 조금씩 정리된다.

뒤엉켜 있던 생각들이 한 줄씩 정렬되고,

이름 없던 감정이

비로소 이름을 얻는다.



시계 초침이 느리게 움직인다.

밤의 시간은 낮보다 천천히 흐른다.

바람이 스치고, 자동차가 지나간다.

그 소리들이 멀어질수록

생각은 단순해진다.


‘이건 괜찮은 하루였을까.’

‘조금은 나아진 걸까.’

대답이 없어도 괜찮다.

이 시간은 묻기 위한 게 아니라,

그냥 나를 바라보기 위한 시간이니까.



노트를 한 장 넘긴다.

지난주에 적어둔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버티는 것도 용기다.”


그땐 위로가 필요해서 쓴 말이었는데,

지금 다시 보니 진심처럼 다가온다.


매일 아침 눈을 뜨고,

하루를 시작하고,

밤이 되어 다시 이 자리에 앉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하다.



펜을 내려놓는다.

오늘은 이 정도면 된다.

길게 쓰지 않아도,

멋지게 쓰지 않아도 괜찮다.

중요한 건 오늘을 남겼다는 것,

이 하루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스탠드를 끄기 전,

노트 한쪽에 작게 적는다.

“오늘의 나, 수고했어.”


이건 다짐도, 위로도 아니다.

그저 사실의 기록이다.

오늘 하루도 살아냈다는,

단순하고도 확실한 사실.



불을 끄면 방 안의 고요가 다시 나를 감싼다.

펜을 내려놓고 노트를 덮는다.

내일 또 이 자리에 앉겠지.

또 다른 하루를 적겠지.


그렇게 하루들이 쌓여,

나의 이야기가 된다.





“쓰는 일은 거창한 게 아니다.

오늘을 잃지 않기 위해

조용히 적어두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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