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의 공기

달력의 마지막 장을 펼치는 아침



12월 1일 월요일, 아침 7시. 현관문을 열자 공기가 달라져 있었다. 11월 30일까지만 해도 느슨했던 대기가 하루 만에 단단해진 느낌이었다. 코끝을 스치는 차가움이 예사롭지 않았다. 겨울이 온 게 아니라, 겨울이 이미 와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 순간이었다.


출근길 버스 안에서 스마트폰 화면을 켰다. 캘린더 앱이 자동으로 12월로 넘어가 있었다. 1일부터 31일까지 빈 칸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고, 손가락으로 스크롤을 내리니 더 이상 넘어갈 달이 없었다. 2025년이라는 해의 마지막 페이지. 아무리 넘겨도 다음 장이 나오지 않는 책의 끝부분처럼, 묘한 막막함이 밀려왔다.


차창 밖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모두 목도리를 두르고 외투 깃을 세운 모습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가벼운 점퍼 차림이던 사람들이 하루 사이에 겨울 옷장을 열어젖힌 것 같았다. 계절은 달력보다 정직했다. 12월 1일이라는 숫자가 찍히기 전부터 이미 공기는 알고 있었던 거다. 우리가 느끼든 못 느끼든, 시간은 제 갈 길을 간다.



회사 책상에 앉아 탁상 달력을 넘겼다. 11월 마지막 장을 떼어내자 12월이 드러났다. 빨간 숫자들이 유난히 많아 보이는 달이었다. 크리스마스, 연말, 송년회, 마감. 남은 한 달이 주는 무게감이 손목까지 전해지는 것 같았다.


동료가 커피를 건네며 말했다. "벌써 12월이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라는 단어가 올해 들어 몇 번째 입 밖으로 나온 건지 모르겠다. 1월에도 그랬고, 여름이 시작될 때도 그랬고, 추석 지나고도 그랬다. 시간은 항상 우리보다 빨랐다.


점심시간, 회사 근처 공원을 걸으며 나뭇가지를 올려다봤다. 거의 다 비어 있었다. 마지막 남은 몇 장의 낙엽이 바람에 떨어졌는데, 떨어지는 게 아니라 놓아주는 것처럼 보였다. 나무는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더 이상 붙들 수 없다는 걸, 계절이 바뀌면 손을 놓아야 한다는 걸.


발밑에 낙엽을 밟으니 바스락 소리가 신발 아래서 작게 부서졌다. 11월의 잔해들이 12월의 땅 위에 깔려 있었다. 지나간 시간은 흔적을 남긴다. 누군가는 그걸 추억이라고 부르고, 누군가는 흔적이라고 부르지만, 나는 그냥 낙엽이라고 불렀다.



퇴근길, 집 근처 편의점에 들렀다. 입구에 크리스마스 장식이 걸려 있었다. 빨간 리본과 초록색 트리, 하얀 솜뭉치로 만든 눈송이가 아직 12월 1일인데도 벌써 연말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계산대 앞에 놓인 달력에는 '2026 NEW YEAR' 문구가 박혀 있었다. 2025년이 채 끝나기도 전에 2026년이 준비되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거실 벽에 걸린 달력을 봤다. 아내가 적어둔 일정들이 빼곡했다. 아이 학원 시간, 병원 예약, 은행 업무, 부모님 생신. 한 달이 꽉 차 있었다. 빈 칸이 없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걸 시각적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워 창밖으로 12월의 첫 밤을 바라봤다. 거리는 평소보다 조용했다. 한 해의 마지막 달이 시작되는 밤치고는 너무 고요했다. 아니, 어쩌면 이게 맞는 건지도 모른다. 시작은 원래 조용한 거다. 요란한 건 끝날 때다.


스마트폰을 다시 켰다. 12월 1일 23시 47분. 올해의 331번째 날이 곧 끝난다. 남은 날은 34일. 손가락으로 계산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지만, 자꾸 세게 됐다. 남은 시간을 세는 습관은 언제부터 생긴 걸까.



침대 옆 서랍에서 작년 12월에 썼던 수첩을 꺼냈다. 2024년 12월 1일에 적어둔 메모가 있었다. '내년에는 더 여유롭게 살자.' 옆에는 체크박스가 있었고, 체크는 되지 않았다. 지키지 못한 약속이었다. 아니, 지킬 수 없는 약속이었다.


2025년 12월 1일, 나는 똑같은 메모를 또 적었다. '내년에는 더 여유롭게 살자.' 체크박스도 그렸다. 내년 이맘때쯤 다시 이 수첩을 펼칠 것이다. 그리고 미완의 체크박스를 보며 또 같은 문장을 쓸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매년 실패하는 것도 나름의 성실함이니까.


불을 껐다. 어둠 속에서 12월의 공기가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차갑고 건조하고 단단한 공기였다. 올해의 마지막 달을 여는 공기. 이 공기를 31일 동안 마시고 나면, 나는 한 살 더 나이를 먹는다. 2025년은 과거가 되고, 2026년이 현재가 된다.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12월 1일도 결국 지나간다. 그리고 12월 2일이 온다. 우리가 준비되든 안 되든, 달력은 넘어간다. 중요한 건 그 시간을 어떻게 채우느냐가 아니라, 그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걸 느끼는 것이었다. 12월 1일의 공기는 그걸 알려주고 있었다.


눈을 감았다. 내일은 12월 2일이다. 한 해의 마지막 달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본문하단 이미지.jpg


이전 01화프롤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