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창가 자리, 펜 끝에서 시작되는 내년
토요일 오후, 집 근처 카페에 들어섰다. 평일보다 한산했다. 창가 자리가 비어 있어서 그 자리에 앉았다. 밖으로는 12월의 거리가 보였다. 사람들이 외투를 여미고 지나갔고, 연말의 공기가 창문 너머로도 느껴졌다. 테이블 위에 가방을 내려놓고 지퍼를 열었다. 어제 문구점에서 산 2026년 다이어리가 들어 있었다. 아직 비닐 포장이 벗겨지지 않은, 새것 특유의 뻣뻣함이 그대로 남아 있는 다이어리.
커피를 주문하고 자리로 돌아와 다이어리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검은색 표지에 2026이라는 숫자가 은색으로 박혀 있었다. 손으로 만지니 매끄러웠다. 아직 펼쳐지지 않은 페이지들 속에 365일이 접혀 있었다. 비닐을 뜯으며 찢어지는 소리가 작게 났다. 표지를 넘기니 첫 페이지에 '2026 DIARY'라고 적혀 있었다. 깨끗했다.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빈칸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펜을 꺼냈다. 검은색 볼펜이었다. 늘 쓰던 것이었다. 1월 첫 페이지를 펼쳤다.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칸이 나뉘어 있었고, 1일, 2일, 3일부터 31일까지 하얀 여백이 펼쳐져 있었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날들. 무엇을 적어야 할까 생각했다. 작년에도 이랬다. 새 다이어리를 앞에 두고 한참을 망설였다. 무엇을 쓸지, 어떻게 채울지, 이번엔 정말 꾸준히 쓸 수 있을지.
커피가 나왔다. 한 모금 마시니 따뜻한 쓴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다이어리를 다시 보며 1월 1일 칸에 펜을 댔다가 멈췄다. 첫 문장이 중요했다. 새해의 첫 문장. 어떤 다짐을 적을까. "올해는 달라질 거야" 같은 문장? 아니면 "건강하게 살자" 같은 문장? 뻔했다. 작년에도 비슷한 말을 적었고, 그걸 지키지 못했다.
펜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창밖을 봤다. 카페 맞은편 서점에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누군가는 책을 사고, 누군가는 그냥 구경만 하고 나왔다. 모두 제각각이었다. 2026년도 그럴 것이다. 계획대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계획과 다르게 흘러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어느 쪽일까. 알 수 없었다.
가방에서 2025년 다이어리를 꺼냈다. 함께 가져온 것이었다. 낡았다. 표지가 구겨져 있었고, 모서리는 닳아 있었다. 1년 동안 들고 다닌 흔적이었다. 펼치니 1월 페이지에 '올해는 운동 꾸준히 하기', '책 한 달에 두 권 읽기', '아이랑 주말마다 놀아주기'라고 적혀 있었다. 체크박스가 그려져 있었지만 체크는 반도 안 되어 있었다. 운동은 3월까지만 했고, 책은 몇 권 읽지 못했으며, 아이랑 놀아주는 것도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미뤘다.
페이지를 넘겼다. 2월, 3월, 4월... 앞쪽은 그래도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일정, 메모, 생각들이 빼곡했지만 뒤로 갈수록 빈칸이 많아졌다. 7월부터는 거의 비어 있었다. 다이어리를 쓰는 것도 작심삼일이었다. 처음에는 열심히 쓰다가 점점 게을러졌고, 연말이 되어서야 다시 펼쳐보니 부끄러웠다. 이루지 못한 약속들, 채우지 못한 페이지들.
2025년 다이어리를 덮고 2026년 다이어리를 다시 펼쳤다. 깨끗한 1월 페이지. 아직 아무것도 적히지 않았다. 작년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거창한 목표를 세우지 말까. 작고 구체적인 것만 적을까. 아니면 아예 계획 같은 건 세우지 말고 그냥 하루하루 일어난 일만 기록할까.
펜을 다시 집었다. 1월 1일 칸에 적었다. '새해 첫날. 가족과 함께.' 짧았지만 거창하지 않았고, 이 정도면 충분했다. 지킬 수 있는 약속이었다. 1월 둘째 주 토요일 칸에도 적었다. '아이 학예회.' 이미 정해진 일정이었고 빠지면 안 되는 날이었다. 체크박스는 그리지 않았다. 어차피 지켜야 하는 일이니까.
2월 페이지로 넘어갔다. 부모님 생신 날짜를 적었고, 결혼기념일도 적었으며, 회사 프로젝트 마감일도 적었다. 하나씩 채워 나가니 다이어리가 조금씩 의미를 갖기 시작했다. 비어 있던 페이지가 채워졌다. 아직은 몇 개 안 되는 일정들이었지만, 이것만으로도 2026년의 윤곽이 어렴풋이 보였다.
커피를 다 마시고 잔을 내려놓으며 다이어리를 쭉 넘겨봤다. 3월, 4월, 5월부터 12월까지. 빈칸이 대부분이었다. 아직 정해지지 않은 날들이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날들이었다. 어쩌면 그게 좋은 건지도 몰랐다. 모든 게 계획대로 되는 삶은 재미없으니까. 예상치 못한 일들이 끼어들고, 계획이 틀어지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12월이 되어 있을 것이다.
옆 테이블에 젊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녀도 다이어리를 펼쳐놓고 뭔가를 적고 있었는데, 색색의 형광펜으로 표시도 하고 스티커도 붙이며 꼼꼼하고 열심이었다. 저렇게 정성껏 꾸민 다이어리는 끝까지 잘 쓸 수 있을까. 아니면 나처럼 중간에 포기하게 될까. 알 수 없었지만, 중요한 건 지금 저렇게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정성껏 채우고 있다는 것이었다. 결과보다 과정이 더 의미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밖으로 해가 기울고 있었다. 12월의 오후는 짧아서 금방 어두워질 것이다. 다이어리를 덮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앞으로 남은 12월 동안 조금씩 더 채워 나가면 될 것 같았다. 한꺼번에 다 적을 필요는 없었다. 천천히, 생각날 때마다, 해야 할 일이 생길 때마다 적으면 됐다.
가방에 두 권의 다이어리를 넣었다. 2025년과 2026년, 끝나가는 해와 시작될 해. 하나는 이미 다 쓴 책이고, 하나는 아직 쓰지 않은 책이었다. 2025년 다이어리는 완벽하지 않았다. 빈칸도 많고, 지키지 못한 약속도 많았지만 그것도 나의 1년이었다. 부끄럽지만 나름대로 살아낸 시간이었다.
2026년 다이어리는 아직 깨끗했다. 실패도 없고 후회도 없었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곧 채워질 것이다. 1월 1일부터 하루하루 무언가가 적히고, 지워지고, 수정될 것이다. 완벽하지 않을 것이고 빈칸도 생길 것이다. 그래도 괜찮았다. 완벽한 다이어리는 없으니까.
카페 문을 열고 나오니 찬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었고, 거리에 불이 하나둘 켜졌다. 크리스마스 장식이 반짝였다. 12월이 깊어지고 있었다. 2025년이 끝나가고 있었고, 2026년이 다가오고 있었다.
가방 속 다이어리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빈 페이지의 무게였고 아직 쓰이지 않은 날들의 무게였다. 무거웠지만 나쁘지 않았다. 기대도 되었다. 어떤 일들이 그 안에 적힐까. 좋은 일도 있을 것이고 나쁜 일도 있을 것이며, 웃는 날도 있을 것이고 우는 날도 있을 것이다. 그 모든 날이 모여서 2026년이 될 것이다.
집으로 걸어가며 생각했다. 새해가 특별한 건 아니다. 12월 31일과 1월 1일 사이에 마법 같은 게 있는 건 아니고, 그냥 날짜가 바뀔 뿐이다. 하지만 새 다이어리를 펼치는 순간만큼은 뭔가 달라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작년보다 나아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그 기분이 중요했다.
현관문을 열었다. 집 안이 따뜻했다. 아내가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다녀왔어?" "응, 다이어리 좀 썼어." "내년 거?" "응." 간단한 대화였다. 방으로 들어가 가방에서 다이어리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2026. 그 숫자가 선명했다.
내일은 12월 다섯째 날이다. 2025년의 남은 날들을 보내고, 2026년의 첫 날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천천히 하면 된다. 급하지 않다. 다이어리는 거기 있을 것이다. 내가 펼칠 때까지, 내가 적을 때까지. 빈 페이지는 기다려준다.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새해는 어차피 온다. 준비되든 안 되든.
책상 옆에 2025년 다이어리도 나란히 놓았다. 끝난 해와 시작될 해를 나란히 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연결되어 있지만 분리되어 있었다. 과거와 미래, 기억과 계획, 후회와 기대. 모두 나의 시간이었다.
불을 껐다. 어둠 속에서 책상 위 다이어리가 희미하게 보였다. 내일 또 펼칠 것이다. 그리고 조금씩 채워갈 것이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고 꾸준하지 못해도 괜찮다. 중요한 건 시작하는 것, 펜을 드는 것, 첫 문장을 적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2026년이 어떤 해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도 모른다. 하지만 다이어리는 있다. 기록할 준비는 되어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 일을 적을 페이지는 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잠이 왔다. 내일은 또 다른 12월의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