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크되지 않은 목록들 앞에서
책상 서랍을 정리하다가 발견했다. 1월에 작성한 새해 목표 리스트였다. A4 용지 한 장에 프린트된 것이었는데, 언제 넣어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종이를 꺼내 펼쳤다. 잉크가 약간 번져 있었고 모서리가 구겨져 있었지만 글자는 선명했다. 하나씩 읽어 내려갔다. '매일 아침 6시 기상', '주 3회 운동', '월 2권 독서', '가족과 주말 여행', '저축 목표 달성', '외국어 공부 시작'. 체크박스가 각 항목 옆에 그려져 있었다. 비어 있는 작은 네모칸들.
손으로 그 체크박스들을 만졌다. 하나도 체크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도 완수하지 못했다. 6시 기상은 일주일도 못 갔고, 운동은 두 달 만에 그만뒀으며, 가족 여행은 한 번도 가지 못했다. 저축은 계획의 절반도 못 했으며, 외국어는 첫 강의도 듣지 않았다. 목록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답답했다. 1월의 나는 참 용감했다. 이 모든 걸 할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
의자에 앉아 종이를 책상 위에 펼쳐놓았다. 형광등 불빛 아래서 글자들이 더 또렷하게 보였다. 새해 첫날, 아마 밤늦게까지 깨어 있으며 이 목록을 만들었을 것이다. 올해는 달라질 거라고 다짐하며, 올해는 정말 해낼 거라고 믿으며. 그때의 나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고 가능성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1년이라는 시간이 충분해 보였고, 이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12월이다. 한 해의 마지막 달. 목록을 다시 보니 낯설었다. 이걸 정말 내가 쓴 건가 싶었다. 저 사람과 나는 같은 사람이 맞나. 1월의 나는 지금의 나를 몰랐다. 3월에 회사 프로젝트가 터질 줄 몰랐고, 5월에 아이가 아파서 병원을 오가게 될 줄 몰랐으며, 여름 내내 야근이 이어질 줄 몰랐다. 가을에 부모님이 편찮으셔서 주말마다 내려가게 될 줄도 몰랐다. 1월의 나는 2025년이 이렇게 흘러갈 줄 몰랐다.
펜을 집어 들었다. 첫 번째 항목 옆에 체크를 해볼까 생각했다. 그냥 형식적으로라도. 하지만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하지 않은 건 하지 않은 거다. 체크박스는 비워두는 게 맞았다. 정직한 실패의 기록. 펜을 도로 내려놓았다.
창밖을 봤다. 12월의 오후 햇살이 책상 위로 비스듬하게 들어왔다. 먼지가 빛 속에서 천천히 떠다녔다.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1월부터 12월까지, 365일이 지나갔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무엇을 했나. 목록에 적힌 것들은 하지 못했지만, 대신 다른 것들을 했다. 회사 프로젝트를 마무리했고, 아이를 돌봤고, 부모님을 챙겼고, 하루하루를 견뎠다. 계획에는 없었지만 해야 했던 일들이었고, 목표는 아니었지만 필요했던 일들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나아졌다. 완전히 실패한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 목록을 완수하지는 못했지만 다른 방식으로 살아냈다는 것. 하지만 동시에 변명처럼 들렸다. "바빠서 못 했어", "어쩔 수 없었어", "상황이 안 됐어". 모두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의지가 부족했고 끈기가 없었으며 쉽게 포기했다. 바쁜 건 핑계였다. 정말 하고 싶었다면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목록을 접었다. 반으로, 그리고 또 반으로. 작은 네모가 됐다. 서랍에 다시 넣을까 생각했다. 내년에도 발견하게 될까. 또다시 이 허무함을 느끼게 될까. 아니면 그냥 버릴까. 쓰레기통에 던져버릴까. 손이 망설여졌다.
결국 서랍에 다시 넣었다. 버릴 수가 없었다. 이것도 나의 일부니까. 2025년의 증거니까. 완벽하지 못한 나, 계획을 지키지 못한 나, 그래도 살아낸 나. 그 모든 게 이 종이 안에 있었다. 체크되지 않은 박스들이 말하고 있었다. 너는 완벽하지 않다고, 계획대로 살지 못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서랍을 닫으니 목록은 보이지 않게 됐다. 하지만 머릿속에는 남았다. 이루지 못한 목표들, 지키지 못한 약속들, 되지 못한 나. 허무했다. 1월의 기대가 클수록 12월의 허무는 더 컸다. 높이 올라간 만큼 떨어지는 거리도 멀었다.
소파에 앉아 천장을 봤다. 하얀 천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비어 있었다. 나의 2025년도 그런 것 같았다. 채우려 했지만 채워지지 않았고, 목표를 세웠지만 이루지 못했으며, 계획을 했지만 실행하지 못했다. 빈칸만 남았다.
스마트폰을 켰다. SNS를 들어가 봤다. 타임라인에 사람들의 글이 올라오고 있었다. "올해 목표 다 달성했어요!", "2025년 정말 보람찬 한 해였어요", "계획했던 것들 모두 이뤄서 뿌듯합니다". 사진도 함께 올라왔다. 마라톤 완주 메달, 쌓인 책들, 여행지 풍경, 다이어리에 빼곡한 글씨. 모두 성공의 증거들이었다.
스마트폰을 내려놓았다. 비교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의 성공이 나의 실패를 더 크게 만들었다. 다른 사람은 해냈는데 나는 못 했다는 생각, 남들은 저렇게 사는데 나는 왜 이 모양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러웠다. 부러우면서도 의심스러웠다. 정말 저렇게 완벽할까. 보여주지 않는 실패도 있지 않을까. 모두가 성공만 하고 사는 건 아닐 텐데.
하지만 그건 위안이 되지 못했다. 남의 실패가 내 실패를 정당화해주지는 않았다. 나는 나대로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그게 사실이었다. 받아들여야 했다. 변명하지 말고, 합리화하지 말고, 그냥 인정해야 했다. 올해는 실패했다고. 계획대로 살지 못했다고.
거실을 걸어 다녔다. 창밖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 12월의 해는 빨리 졌다. 오후 다섯 시인데 벌써 어두워지고 있었다. 시간은 빨랐다. 1월에 목표를 세운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12월이었다. 남은 날도 얼마 없었다. 한 달도 안 남았다. 2025년은 곧 끝난다.
주방에서 물을 마셨다. 목이 말랐다. 물을 삼키며 생각했다. 실패는 끝이 아니다. 한 해를 망쳤다고 인생이 끝나는 건 아니다. 2026년이 온다. 다시 시작할 수 있고 새로운 목표를 세울 수 있으며 이번엔 다르게 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알고 있었다. 내년에도 비슷할 거라는 것을. 또 목표를 세우고, 또 지키지 못하고, 또 허무해질 거라는 것.
그래도 괜찮을까. 매년 실패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까. 이루지 못하는 목표를 계속 세우는 게 의미가 있을까.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았다. 목표를 세우지 않는 것보다는 세우는 게 나을 것 같다는 것, 실패하더라도 방향은 있는 게 낫다는 것,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목적지는 있어야 한다는 것.
책상으로 돌아와 서랍을 다시 열었다. 접힌 목록을 꺼내 펼쳤다. 다시 한 번 읽었다. 이번에는 다르게 읽혔다. 실패한 목록이 아니라 시도한 목록으로, 이루지 못한 게 아니라 꿈꿨던 것으로, 하지 못한 게 아니라 하고 싶었던 것으로. 관점이 바뀌니 감정도 조금 달라졌다.
목록 뒷면에 펜으로 적었다. '2025년, 완벽하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살았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솔직한 문장이었다. 목표는 이루지 못했어도 삶은 살아냈다. 계획대로 되지 않았어도 하루하루는 지나갔다.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종이를 다시 접었다. 이번에는 조심스럽게. 서랍 깊숙한 곳에 넣었다. 내년에도 발견할 것이다. 또 허무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2026년의 목록도 함께 있을 것이고, 두 해의 실패가 쌓일 것이며, 어쩌면 그 다음 해도, 그 다음 해도 실패는 계속 쌓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인생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벽하게 사는 사람은 없고, 모든 목표를 이루는 사람도 없다. 우리는 모두 뭔가를 이루지 못한 채 살아간다. 빈칸을 안고 산다. 미완성의 상태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게 자연스러운 거다. 완성된 삶은 끝난 삶이니까.
소파에 다시 앉았다.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 것 같았다. 완전히 괜찮아진 건 아니었고 여전히 허무했으며 여전히 아쉬웠지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것도 나의 2025년이라고. 부족했지만 나의 한 해였다고.
창밖이 어두워졌다. 불을 켰다. 거실이 밝아졌고 어둠 속에 있던 물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소파, 테이블, 책장, 액자. 모두 제자리에 있었다. 변한 게 없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1월의 나나 12월의 나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부족하고, 여전히 완벽하지 못하고, 여전히 노력 중이었다.
저녁을 먹고 침대에 누웠다. 오늘 하루도 지나갔다. 내일은 12월의 또 다른 날이 올 것이다. 목표 없이 사는 하루가 아니라, 목표를 이루지 못하면서 사는 하루. 차이가 있었다. 전자는 무기력이고 후자는 과정이었다. 나는 과정 속에 있었다. 아직 도착하지 못했지만 가고 있었고, 느리지만 움직이고 있었다.
내년에도 목표를 세울 것이다. 아마 비슷한 내용일 것이다. 운동, 독서, 저축, 가족과의 시간 같은 평범한 목표들. 그리고 또 실패할 것이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는. 하지만 괜찮았다. 세우는 것 자체가 의미였고, 방향을 잡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도착하지 못해도 출발은 할 수 있으니까.
서랍 속 목록이 떠올랐다. 체크되지 않은 박스들, 빈칸으로 남은 한 해, 허무했지만 버릴 수는 없는 것. 그게 나의 2025년이었다. 완벽하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살았던 시간이고, 이루지 못했지만 시도했던 날들이며, 실패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던 순간들이었다.
눈을 감았다. 내일도 아마 비슷할 것이다. 목표와 현실 사이 어딘가에서 하루를 보낼 것이다. 완벽하지 못하지만 최선을 다하는 척하며, 이루지 못하지만 포기하지 않는 척하며. 그렇게 12월도 지나갈 것이고, 2025년도 끝날 것이며, 2026년이 올 것이다. 새로운 목록과 함께, 새로운 기대와 함께, 그리고 아마도 새로운 실패와 함께.
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사는 게 그런 거니까.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니까. 중요한 건 계속 세우는 것, 계속 시도하는 것, 계속 살아가는 것이었다. 체크박스가 비어 있어도, 목표를 이루지 못해도, 우리는 계속 살아간다. 그게 실패가 아니라 과정이라고 믿으며.
잠이 왔다. 허무함도 함께 잠들었다. 내일은 조금 나을 것이다. 아니,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괜찮았다. 하루하루가 쌓여서 한 해가 되니까. 완벽하지 않은 날들이 모여서 나름대로의 삶이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