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현수 May 11. 2019

양비론은 '아무것도 안 고르는게 최선일 때’만 가치있다

[일상잡설]

세상 쉽고 현명하고 쿨해 보이는 방법이 있다.

양비론이다.

엉킬대로 엉킨 현실의 한계는 덮어두고 쌀로 밥짓는 소리 유려하게 뽑아내면, 그런 현인이 없다. 현학적으로 보일까 싶으면 세속에 무심한 듯 건조한 시선을 얹으면 쉬크하다.



양비론과 중용은 다르다.


양비론이 그나마 가치가 있으려면, ‘아무 것도 고르지 않는 것이 하나의 좋은 선택’일 때 뿐이다. 의미있는 중도나 중용은 그 자체가 하나의 가치있는 선택이나 대안이기 때문이다.


둘다 손가락질이나 해대다 결국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는게 최악이라면, 게다가 그 최악을 막으려 어느 한쪽에 힘겹게 서있는 사람들을 비아냥거리기까지 한다면, 그때의 양비론은 게으른 해악을 넘어 주도적 민폐다.


배려는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 생각있는 자들이 베푼다. 호구라서 배려하는게 아니라, 내게도 마주할 상황을 상상할 줄 알아서 미리 배려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다. 생각이 없고 보이는게 없어 솔로몬 코스프레 안 하는게 아니다. 나와 내 아이들에게 도래할 상황을 생각해서 더럽고 힘들어도 꾸준히 선택과 지지를 쌓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너무도 어리석어 잔인하기까지 했던 과거 우리의 사회적 선택이 되풀이 될까봐서다.


이미 우리는 전적(前績)이 있다.


나는 여전히 궁금하다. 촛불로 부패한 권력을 무너뜨렸다고 사람들이 한껏 젠체할 일인지 모르겠다. 애초에 잘못의 서막은 우리의 선택에서 출발했다. 국민 스스로 과반수 득표를 보태줬다. 촛불은 그 잘못된 선택을, 본인들이 뒤늦게 수습한 행위다. 잘못을 했으면 책임지고 수습해야 하는건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건 당연한 일이고 다시 반복하면 안되는 숙연하고 민망한 일이다.


그럴 줄 몰랐다 말하고 싶겠지만 되짚어보면 아닐 뿐더러, 몰랐다한들 잘못을 수습한 일을 마냥 자랑스워하기도 민망하다. 그 과정에서 그간 양비론으로 정치혐오에 기여하고 아무 선택도 입장도 쌓아주지 않았던 사람들은, 그저 슬기로웠던 현인들이었나.


정치는 선택과 지지의 누적이다.


정치는 대중이 매순간 선택한 지지와 입장이 쌓인 결과다. 그것이 여론이고, 여론의 누적을 바탕으로 정치는 그 책임자인 국민에게 ‘선택의 옵션’를 설계해주기 때문이다.


골라야 하는 옵션이 정히 싹다 싫으면, 대안이 필요하다. 물론 쌀로 밥을 지어요는 대안이 아니다. 대안을 낼 수도 없고 낼 위치도 아니라면, 골라야 한다. 그러니 투표 당일에 도장 한번 찍으면 다가 아니다. 그때의 후보자 번호는 그동안 선택과 지지에 참여했던 자들이 설계한 ‘선택의 보기’에 불과하다.


고고하게 양쪽 다 핀잔이나 날리며 선택과 지지를 쌓아놓지 않으면, 만날 어이없는 보기에서 하나 골라 도장 찍고 나와야 한다. 그리곤 다시 무한루프다. 양쪽 다 못난 놈들이라며 양비론 시전. 차린 만찬이 별로라며 혀나 끌끌 차다가 가장 썩은 생선을 구겨넣는다.


가장 못난건 누구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